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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복지관 효도관광에 참가하고 5월은 초록의 계절이다. 밤비에 씻긴 나뭇잎이 다소곳이 푸르름을 수줍어하고, 꽃바람 향기를 실은 햇빛이 고루 퍼진다. 담 밑의 고양이가 졸면 멍멍이도 별 수없이 하품을 해대는 시골풍경이 떠오른다. 지난 5월 21일 일요일 아침 8시에 중구종합사회복지관에 갔다. 효도관광차 언양온천에 가는 날이다. 버스가 두 대다. 모인 노인들 틈에 고교생이 꽤 끼여있다. 노인들 대부분이 보행이 부자유스러워 보였다. 할아버지보다 할머니가 더 많았다. 복지관 여직원이 노인과 학생들을 짝지어 줬다. 내 짝은 예쁘장한 고1의 여학생이었다. 떨어져 사는 손녀딸과 닮은 학생이다. 학생들의 부축을 받으며 차에 오르니 창가에 앉혀줬다. 복지관청년회의 자원봉사대원들인가 싶었다. 수녀님도 타고 구청과장님의 인사말도 있었다. 초여름의 맑은 햇빛과 싱그러움이 차창을 꽉 채우고 학생들의 젊음을 안고 버스는 달렸다. 온천은 피로누적과 노인병에 좋단다. 탕 안에서 남학생들은 등을 밀어줬다. 목욕을 끝내고 점심은 복지관서 장만해 온 걸 같이 먹었다. 시간이 있어 통도사에 들렀다. 20년 전에 중학동기생 내외와 온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무엇이 바빴던지 벌써 하늘나라로 가고 없다. 벗은 갔건만 산과 절은 그대롤세…, 유행가 가사 같다. 내려오는 차도 옆은 계곡이었다. 계곡에는 적지 않은 가족들이 자리를 깔고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 녹음아래 바위사이로 산물이 흐르고 오후의 태양은 벌써 산봉우리를 향하고 있었다. 뜻 있고 고마운 하루였다. 지금은 밤, 오늘 하루를 생각해 본다. 늙은이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고교생들의 착한 마음 쓰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자칫 축축하고 힘겨워 질 행사가 되기 쉬운 효도관광이건만 이렇게 가볍고 감사함만 남은 것은 어째서일까?… 김영수 영주1동 62-63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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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역사이야기 한때 부산의 중심가 교통의 요충지대에 에워싸여 부산시의 으뜸 명소로서 지금도 부산 시민들이 즐겨찾는 용두산의 옛 이름은 송현산(松峴山)이었다. 아름드리 곰솔(海松)들이 짙푸르게 우거져 그렇게 불러들 오다가 산의 모양이 마치 용(龍)이 머리를 쳐들고 바다를 건너서 보는 듯 하다고 용두산(龍頭山)으로, 대청로 허리를 타고 옛 시청이 있던 곳에 조그마한 산을 용미산(龍尾山)이라 불러왔다. 용두산은 부산의 역사를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유서깊은 산이기도 하다. 조선후기에는 용두산 얼안 11만평에 초량왜관(1678∼1876)이 들어서면서 많은 해송들이 벌채되기도 하였고 부산항이 개항(1876년)되고부터는 일본사람들의 전관(專管) 거류지역이 되어 용두산 일대가 일본거리로 깡그리 탈바꿈하기도 하였다. 초량왜관 때 일본인들은 이곳에 그들의 재보신(財寶神)인 변재천(辨財天)을 모신 변재천 신사(神社)를 두어 머리에 흰뱀으로 장식된 보배관을 쓰고 오른손에는 칼을, 왼손에는 보배구를 든 신화(神畵)를 걸어두었다. 그러다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면서 변재천신과 더불어 그들 일본인의 조상으로 일컬어지는 아마데라스 오호미까미(天照大神)를 함께 모시는 「용두산 신사」가 되었는데 그 뒤 어느때인가 모르지만 변재천신은 없어지고 천조대신만 모셔두어 그들 최고의 신당으로 존숭되기도 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조선총독부는 1935년 9월 우리나라 모든 학교에 이른바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강요하면서 조선의 혼마저 앗아가려고 발버둥을 친 현장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들은 1927년 신사를 크게 고쳐 지으면서 광복동쪽에서 용두산으로 오르는 비탈길에 깔려있던 돌계단을 새로 마련하였다.(당시의 돌계단 표식돌은 중구청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계단은 유행가 「용두산 엘레지」에 364계단(일년계단)으로 불려지기도 한 애환을 지니기도 하였으며, 해방 후 미군이 부산에 진주하면서 짓궂은 미군병사가 찝차를 몰고 가파른 용두산 돌계단을 올라가는 바람에 그 진풍경을 바라보던 부산 사람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하였다는데 지금은 에스컬레이터가 놓여져 그 어디고 옛 정취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8.15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치욕을 안겨준 용두산 신사부터 젊은이들의 손에 의해 헐리었고 해방의 기쁨도 잠시 뿐 6.25동란으로 전국 각지에서 부산으로 밀려든 피난민들로 인해 용두산은 판자촌 천국이 되고 만다. 그러나 1954년 12월 10일에 일어났던 큰불은 용두산 피난민촌을 깡그리 불태우고 그나마 남아있던 아름다운 소나무마저 태워버리고 말았다. 본래 높이가 해발 60m이던 용두산은 이런저런 봉변을 당하면서 44m로 낮아지고 시민공원으로 꾸며졌으며 높이가 118m에 달하는 「부산탑」이 세워지면서 부산 앞바다는 물론 낙동강 하구까지 손에 잡힐 듯이 환히 내려다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용두산 공원에는 경주 불국사 다보탑을 본떠 만든 「부산탑」외에 「충무공 이순신 동상」과 「4월 민주혁명 희생자 유령탑」이 서 있고 「백산 안희제선생 흉상」과 「용두산 미술전시관」이 마련되어 있어 찾는 이들이 줄을 잇고 있다. 그리고 대청동쪽에서 용두산으로 오르는 길 왼쪽 섶에는 부산 출신 시인들의 「시비」 9기가 늘어서 있어 시를 암송하는 즐거움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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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뉴스 중구청(구청장 이인준)에서는 6^25전쟁 50주년을 맞아 6월 23일 40계단 문화관광 이벤트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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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뉴스 6월 10일 새부산예식장에서 200여명의 축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동거부부 13쌍이 무료합동결혼식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