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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체험수기 당선작 - 참담했던 피난길과 피난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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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나이스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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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민의 형편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그나마 취직을 한 사람들은 나은 편이었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잘 곳이 없어서 산 속의 굴로 찾아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을 지경이었다. 광복동 일대에도 건물이라곤 드문드문 있을 뿐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다.  1950년 12월 4일, 나는 두 번 다시 밟지 못하게 될 고향을 떠나왔다. 감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던 평안남도 진남포, 1·4후퇴 전이었지만, 이미 중공군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고 남정네를 시작으로 하여 마을 사람들의 대부분이 고향을 떠나고 있었다.  그때 서른 하나의 나는 가족도 없는 홀홀 단신이었다. 보호해 줄 가족이 없기에 더욱 떠나야했지만 멀고도 긴 여정의 길을 여자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무리였었고 또한 두려움도 컸었다.  그렇게 며칠을 미적거리고 있는데, 어느 날 친구가 찾아오더니 같이 떠나기를 청하는 것이었다. 친구도 여덟 살 난 딸과 세 살박이 아들이 있을 뿐 홀로이기는 마찬가지였었다. 두 여자가 가족처럼 서로 의지하며 길을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여 명주 저고리에 깨끼옷을 입고 버선까지 두툼하게 신은 우리는 쌀 닷 되씩을 지고 길을 떠났다.  서울까지는 80리라고 누가 그랬던가? 하지만 오면서 들리는 마을마다 물어보아도 한결같이 서울까지는 80리라고 하는 통에 길은 줄어든 기색이 없이 아득하게만 느껴졌었다. 게다가 어린아이들까지 있어서 걸음은 느리고 설상가상 쌀도 금방 떨어져버렸다. 중간 중간 마을로 들어가 피난을 떠나지 않고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쌀이며 당장 필요한 것들을 사기도 했지만 곧 벌어질 싸움 때문인지 인심이 무척 사나운 편이었다.  고향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을 견뎌야만 했었다. 가져간 쌀이며 돈으로 배고픔은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지만 추위는 정말로 참기가 힘들었다.  낮이며 밤이며 가릴 것 없이 걸어다닌 탓에 두툼하게 신은 버선은 어느새 헤어져 발가락이 삐죽이 보일 정도였고 손이며 어깨며 어느 한 곳이랄 것 없이 죄다 동상에 걸려 살들이 짓물러 있었다.  그렇게 이십 일을 걸려 도착한 서울은 한산하기가 그지없었다. 이때에도 벌써 서울 사람들은 부산으로 떠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같은 고향분으로 철도 순경을 하고 계시던 분을 찾아 서울역으로 갔다. 다행히 그 분은 떠나지 않고 계셨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없는지 철도 관사는 텅 빈 채였다. 우리는 그분의 도움으로 텅 빈 관사에 일주일간 머무를 수 있었고, 그나마 얼마간이라도 다리를 쭉 뻗고 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서울에 마냥 있을 수만은 없었다. 부산까지 내려가야 안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다시 고향 분의 도움으로 그야말로 인산인해인 발 디딜 틈도 없어 지붕 위에까지 사람들이 들어찬 기차를 겨우 탈 수 있었다.  그때 부산역 앞마당은 갈 곳 없는 피난민들의 집결지인 것처럼 보였다. 한쪽에서는 이북에서 온 피난민들이, 다른 쪽에는 서울에서 온 피난민들이 또 다른 쪽에서는 한국인 남편을 둔 일본 여자들이 한데 모여 서 있었고, 거적때기를 깔고 깡통에 밥을 지으며 아예 살림을 펼쳐놓은 곳도 부지기수였다. 그 한 가운데에서 우리는 어디로 발걸음을 옮겨야할지 가늠도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살 곳도 먹을 것도 없었으니, 목적지인 부산까지 오긴 왔으나 그저 망막하기만 했던 것이다.  당장 일자리가 필요했다. 고향에서 떠나올 때 수중에 얼마간의 돈을 가지고 오긴 했으나 도중에 북한 돈을 가지고 있으면 반공이라며 처벌을 받는다고 하여 산 속에 버리고 왔기에 그야말로 돈 한푼 남아있지가 않았다.  친구는 아이들 때문에 일자리를 구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거제도에 있는 피난민 수용소로 찾아갔다. 그리고 나는 다행히 동광동에 있는 지금의 부원아파트 근처의 `한성관'이라는 식당에 취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피난민의 형편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그나마 취직을 한 사람들은 나은 편이었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잘 곳이 없어서 산 속의 굴로 찾아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을 지경이었다. 광복동 일대에도 건물이라곤 드문드문 있을 뿐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다.  `한성관'이라는 식당에서는 거의 일 년 정도를 일했었다. 손등이 터서 갈라져 피가 흐를 정도로 힘들었었지만 나는 그 일년 동안 식당에서 먹고 자는 것 외에 사천원의 돈을 모으기도 하였다.  피난민 수용소로 간 친구와 아이들은 더욱 형편이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배급이라고 나온 것이 멀건 죽으로 세 숟가락 먹고 나면 없을 정도로 형편이 없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틈틈이 바닷가로 나가 담치나 파래를 뜯어와서 반찬거리로 장만하기도 했었단다. 보기에도 거기에 더 있다가는 친구와 아이들 모두 굶어죽을 것만 같았다. 나를 쳐다보는 친구의 눈빛에는 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나는 식당을 그만두고 우선 우리가 살집을 구하기로 하였다. 사실 사천원 가지고는 판잣집조차 구할 수가 없었다. 당시 부두 근처에는 피난민들이 만들어 놓은 판잣집이며 천막집 가마니집까지 한데 섞여 다닥다닥 게딱지처럼 붙어있었다. 우리는 제3부두로 갔다. 그곳 빈자리에다가 기둥을 세우고 가마니를 뜯어서 둘러쳐 벽을 만들고 시커먼 기름칠을 한 미군 박스를 천장에 올려 세웠다. 지금에서야 상상도 할 수 없는 집을 만든 셈이었다.  하지만 피난 와서 우리가 처음으로 마련한 집이었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쉴 수 있는 집이었다. 집을 마련함과 동시에 생애 첫 장삿길로 들어선 것도 이때부터였다. 장사를 시작하면서부터는 고향도 잊은 채 살기에 바빠 어느 덧 여든여섯의 나이까지 오게 된 것이다. 복이라면 복이랄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아직까지도 눈만 감으면 고향산이 가물하게 잡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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