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구민이 주인되는 행복도시 중구
- 장발 머리를 뽐내며 젖은 목소리로 말하는 디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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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4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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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홍보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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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업의 중구이야기 115 - 7080 음악다방 DJ

7080포크송, 대중음악화 기여
낡고 어두운 실내에 누렇게 변색된 커텐이 쳐진 창문 틈으로 햇살이 비집고 들어오고 오래된 스피커에서 당시 유행하던 가요나 물 건너 온 재즈 샹송들이 온기를 품으며 은은히 들려오면 다방은 활기를 찾는다.
그 시절 속칭 `판돌이'라 부르는 DJ(디제이, 디스크 자키)가 다방 내 따로 마련된 뮤직박스 안에서 LP(엘피)판을 골라 신청곡 들려주는 음악다방과 다방 DJ들이 문화가의 스타처럼 다방가를 포진하고 있었다. 신청음악을 들려줄 때면, 예의 장발머리를 두 손으로 멋지게 쓰다듬어 돌리며, 셔츠 윗 포켓에 찔러 넣어둔 굵은 빗살의 커다란 빗을 꺼내 머리를 빗어 내리는 DJ의 모습은 마음 여린 소녀들의 가슴을 헤집어 놓았다.
"오늘도 또 해 저물고 희미한 불빛들이 하나둘 켜질 때면, 우수에 잠긴 그대 모습에 DJ 마음도 덩달아 무거워진답니다…" 등등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DJ의 한마디 한마디에 귀 쫑긋거리며 온갖 나래를 피우던 학창시절의 추억을 오랫동안 간직해 온 그 주인공은 가수도 연예인도 아니었다. 연예인보다 더 귀한 한 시대를 주름잡고 풍미했던 주인공은 바로 음악다방 DJ였다. 옛 음악감상실이 라디오 방송에 음악프로가 생기면서 자취를 감추면서 기존 다방 형태에 음악을 앞세운 이른바 음악다방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음악감상실처럼 DJ가 멘트를 하면서 음악을 틀어주는 형식으로 바뀌어 갔다. 그 발단은 광복동의 `황금다방' `수다방' 그리고 서면에는 `꽃사슴다방'에서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남포동 구두골목의 수많은 학사주점에도 판돌이 DJ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재력 있는 사장들이 인기 있는 DJ를 스카웃해와 멘트까지 시키면서 DJ 양산시대가 되어갔다.
이 DJ들은 수많은 7080포크송들을 대중음악으로 발전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심지어 새음반을 출시한 서울 가수들이 부산에 와서 DJ를 만나 음반을 내밀며 홍보를 부탁하기도 했다(필자는 이들을 기억하고 있다). 통기타 가수들과 DJ와의 만남에 의해 만들어지는 버스킹 뮤직은 우리문화사에도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다방 DJ들은 인기에 비해 그들이 받는 보수는 너무 적었다. 70년대에는 4∼5만원을 받았고, 메인은 12만원, 80년대 초반은 17∼18만원, 후반에서 90년대 사이엔 20∼25만원 수준의 월급을 받았다. 당시 생맥주 1000cc 한 잔에 1000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이들은 푸대접을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말없이 열심이었을 뿐이었고, 그 일에 목을 맸다. 땅값이 비싸기로 소문난 광복동에서 20여 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켜왔던 `무아음악실'은 이 땅 대중문화의 산실이고 살아있는 음악역사였다. 이상민, 배경모, 유문규, 백형두, 강동진, 백태수, 윤주은, 정병호 등이 모두 무아음악실 출신 DJ다. 더러는 사망하고 더러는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지금도 중구에 남아서 소규모 음악실을 경영하는 이도 있다. 당시 인기 가수를 초청하여 라이브 공연을 열었던 곳은 무아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무아 음악실은 음악다방 DJ들이 목을 매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요즈음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글로벌 `카페'에서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어쩌면 유치해(?) 보일 추억이지만 60∼70대 이상 장년들은 아직도 그 다방 추억들이 눈에 선하게 다가온다. "그 음악은 제발 틀지 마세요 DJ. 언제나 우리가 만났던 찻집에서 다정한 밀어처럼 들려오던 그 노래…" 윤시내의 `DJ에게'가 새삼 그리워진다. 따블 위스키 한 잔 시켜놓고 맘씨 곱고 잔잔해 보이는 마담언니와 더불어 도란도란 얘기도 나누고 싶어진다. 어제 갓 들어온 레지에게도 모닝커피 한 잔 보내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