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업의 중구이야기 35 - 골목이야기 1

한국동란 후 한순돌 씨 식구
미화당 뒷골목에 국수 팔며 시작
정영기 씨 `남마담집' 고갈비
70, 80년대 이르러 골목 `성황'
"우리네 골목에는 아련한 추억이 고여 있다. 오랜 세월이 켜켜이 쌓이면서, 그 속에 쟁여져 있던 삶의 애환과 그 시절 기억의 조각들이 사금파리 앉은 햇빛처럼 반짝인다."
(시인 최원준)
아파트와 아파트를 싸고도는 길을 골목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 길에는 우리가 친숙했던 바자울도 없고 돌담도 사립문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골목길에 지천으로 피어 있던 맨드라미와 채송화, 봉숭아도 없다. 그런 메마른 아파트 길에는 구슬치기 할 아이들도 숨바꼭질 할 아이들도 모두 영어학원엘 가고 피아노 교습 받으러 가서 동네 개구쟁이들은 그림자 구경마저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아파트촌을 벗어나면 더러는 모양새가 바뀌었어도 골목길이 남아 있다. 이른바 도시골목이다. 아스팔트로 매끈하게 다듬어 자동찻길로 함께 쓰는 골목이 있는가 하면, 시멘트를 덕지덕지 발라 진개장(쓰레기를 버리는 곳)을 겨우 면한 골목도 있다. 그 골목을 찾아가보자.
부산의 원도심 한복판에 `고갈비 골목'이 있다. 용두산 남단 언덕바지로서 광복로와 연결되는 골목에 고갈비를 구워 파는 가게들이 모여 있어 고갈비 골목이라 했다. 한국동란 이후 경주에서 온 한순돌(88세) 씨 여덟 식구가 미화당(지금의 ABC마트) 뒷골목에 루핑지붕의 판잣집을 얻어 막걸리와 국수를 팔기 시작한 것으로부터 이 골목의 역사는 시작한다. 60년대에 할매집 옆에 노총각 정영기 씨가 막걸리집을 열어 자갈치시장에서 싸게 구입해 온 고등어를 굽어내기 시작하면서 이 술안주 `고갈비'는 급속도로 번져 골목을 고갈비 골목으로 만든다. 노총각 정영기 씨의 말과 행동거지가 여성스럽다고 손님들이 남마담(남자마담)이라 부른 것이 `남마담집'이 되었다.
이즈음 고갈비 골목은 용돈이 궁한 대학생들과 할 일 없는 젊은이들이 주고객이었으므로 비싼 안주는 생각지도 못했다. 남마담집에서 시작한 고갈비는 할매집에서 할매손맛으로 주당을 끌어들였다. 딸 순돌 씨는 입이 거세어서 동네에서 `욕쟁이', `양칠'이란 별명을 달고 살았다. 60년대부터 번져나간 고갈비는 70, 80년대에 이르러 성황을 이룬다. 광복동 야시장이 활기 띌 때는 할매집, 남마담집을 비롯하여 담배집, 돌고래, 청기와집, 맘보, 고바우, 불갈비, 갈박사, 단골집, 청코너, 홍코너 등 12집이 성행하여 저녁이 되면 골목이 고갈비 굽는 연기와 냄새로 가득 찼었다.
누나집 건물에서 영업하던 남마담 정영기 씨가 결혼하면서 74년 이 일대를 잘아는 조한규 씨가 인수하여 부인(임순애, 71세)이 경영을 맡아 지금에 이르고 있고, 할매집은 아들 박성하(58세) 부부가 맡았다. 그 시절 호주머니 사정이 바닥인 젊은이들에게 고갈비는 인기 짱이었다. 돼지갈비는 뜯지 못해도 고등어를 발라 구운 안주는 탁주와 소주 안주에 제격이었다. 주당들은 탁주를 `야쿠르트'라 부르고, 소주는 `이순신꼬냑'이라 불렀다. 깍두기는 `못잊어', 얇은 무가 동동 뜨는 물김치는 `파인애플', 물은 `개구리운동장', `오리방석'이라 부르면서 멋을 부렸다. 주인에게 그냥 막걸리 달라면 들은 체 만 체 했었다,
아침나절 문 열면 해장한다고 들이닥쳤고, 저녁이면 무슨 무슨 모임 한다면서 떼거리로 몰려와 양 집의 2층 다락을 채우고 그것도 모자라 길거리에 난장을 폈다. 용두산 돌계단 길을 내려온 가난한 연인들도 그 한쪽에서 사랑을 키웠다. 지금에야 옛이야기로 들리지만 그땐 그래도 그런 낭만이 넘치는 골목이었다.
문의 ▶부산민학회 255-5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