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구민이 주인되는 행복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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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추천도서 ( 507호 )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의 저자 혜민 스님의 3년 만의 신작! 복잡하고 소란한 세상 속 나 자신을 잃어가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
혜민 스님 지음/수오서재/15,000원
히피

자유와 평화, 음악, 패션, 여행을 사랑한 원조 `힙스터'들의 세계 여행! 세상이라는 진실한 교실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와 `나'를 찾아 나서는 매직 버스 라이드.
파울로 코엘료 지음/문학동네/14,500원 자료:남포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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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자락 ( 507호 )
담쟁이 넝쿨
이창희
담쟁이에게
벼랑은 깎아지를수록 즐겁다
바람에 떠밀려
낭패를 본 이들을 향해
위의 것을 살피면서
한걸음씩 나아간다면
기어이 푸르게
절망을 덮을 수 있을 것이다
담쟁이 넝쿨 흥얼거리며
담벼락을 넘어가고 있다
경남 합천 출생. 1985년 `월간문학' 신인상, 부산문화방송 신인문예상으로 등단. 시집 `사람이 되려고', `다시 별 그리기', `사인 탑승' 등.
담쟁이는 천 길 낭떠러지의 `벼랑'을 보면 오히려 즐겁다. 도전의식이 새록새록 넘쳐흐르는, 앞서가는 자의 발걸음과 다름 아니다. 담쟁이에게는 `바람에 떠밀려' 벼랑 앞에 선 이들이, 마치 `길을 잃은 어린 양'과 같은 존재로 보인다. 이들에게 담쟁이는, 한 걸음씩 `제 갈 길'로 나아간다면 절망의 나락 또한 `푸른 희망의 잎사귀로 뒤덮을 수 있다'고 속삭인다.
다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지난해의 아쉬움과 후회, 또는 절망의 시간을 보낸 이라면, 이 불편한 기억들을 `작년'이라는 단어 속에 묻어버리고 싶을 터이다. 이럴 때 한 발 한 발 `절망의 벼랑을 기어오르며', 기어이 `담벼락을 넘고야 마는' 담쟁이 넝쿨의 전언을 문득 떠올려 보는 것도 좋겠다. 최원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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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중구에 위치했던 선교사들의 마을 ( 507호 )
주경업의 중구이야기 59 영선고갯길 들여다보기 4부산선교기지(상)
1884년 선교사 알렌 부산 첫발
영서현교회, 한강이남 최초 교회
코모도호텔 부근에 `어을빈병원'
1884년 9월 14일 미국의 의료선교사 알렌(Horance Newton Allen, 1858-1932)이 부산에 첫발을 내딛는다. "부산은 완전히 왜색도시다. 도시 변두리로 가지 않고는 조선사람이라곤 거의 찾아 볼 수 없을 정도이다. 일본인은 아주 우아한 백색건물을 영사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부산은 훌륭한 항구이다. 그러나 전기가 없고 편의시설이 없었다."(「알렌일기」) 조선에 대한 예비지식이 전혀 없는 선교사 알렌은 부산항에 첫발을 내디딘 역사적인 순간을 눈에 보이는 대로 기록했다. 부산에 오기 위해 거쳐 왔던 중국의 상해나 일본의 오사카항 보다 훨씬 후미져 보였던 부산항의 모습이 바로 이랬다.
그러나 이를 시작으로 한국에는 미국북장로교회(1884)와 호주장로교회(1889), 미국남장로교회(1892), 그리고 캐나다장로교회(1898) 등 여러 나라 장로교회들이 선교사를 파견해왔다. 1885년에는 미국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1890년에는 캐나다 의료선교사 하디가 부산에 도착하였다. 하디는 한국인 주택 방 한 칸을 빌려 살면서 조선어공부에 전력하는 한편, 찾아오는 환자들을 진료했으나 자신의 방이 협소하고 어두워 집 마당에서 환자를 진료하였다고 한다. 한편 미북장로교는 1891년 1월, 29세의 선교사 베어드를 부산지부 선교사로 임명하여 부산으로 보내 언더우드와 함께 부산에 선교부지를 매입하게 한다. 하지만 외모도 낯설고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선교사에게 선뜻 집을 내어놓는 사람은 없었다.
세관전속의사로 있는 하디의 도움으로 이탈리아인의 주선을 받아 일본인 거류지역인 영서현(暎署峴, 지금의 대청동과 영주동 사이의 중구청 고갯길)의 `세 필지의 땅'을 `외국인 거주지'란 이름으로 매입할 수 있었다. 초량을 약간 벗어난 이곳은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 땅이었다(돻초량교회 120년 약사돽(2013)는 이곳의 위치를 코모도호텔 부근으로 기록한다). 베어드는 이 땅값을 두 번 지불하여야 했다. 첫 번째는 정부로부터 거주지허가를 얻기 위해 지불하여야 했고, 두 번째는 땅의 실소유주에게 였다고 그의 파일(R.Baird 21)에 기록하고 있다. 바로 이곳에 1891년 9월 24일부터 선교관(부산선교기지. Fusan Mission Station)을 짓기 시작했다. 이듬해 2월에는 기와지붕을 얹어 비바람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하디의 집에 신세지고 있던 베어드도 이사했다. 그러나 건축일을 맡은 중국인부들의 무성의와 약속불이행으로 인한 불화 등으로 숱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1892년 6월 드디어 선교관이 완공되었다(돻부경교회사연구돽 제3호. 2006. p50∼52). 1887년에 건축된 세관건물에 이어 부산에 세워진 두 번째 서양식 건축이었다. 부산을 거쳐 가는 거의 모든 선교사들이 모두 이집을 거쳐 갔다.
베어드는 선교사택을 `사랑방' 형식으로 개방하고 부산에서의 선교를 시작하였다. 한문서당을 개설하여 기독교 교육과 일반교양 과목도 가르치면서 학생들을 주일예배에 참석하도록 유도하여 재학생이 100여 명에 이르렀다. 교회이름을 영서현교회로 불렀다. 한강 이남에 최초로 설립된 교회였다. 돻초량교회 120년 약사돽의 머리 사진판에는 `미북장로교회 부산선교기지'란 표기의 일명 영서현 선교사 마을의 사진이 실려 있다.
높은 축대를 쌓은 언덕 위에 이국냄새가 풍기는 서양식의 집들이 이중 언덕 아래위로 배치되었는데, 베어드와 로스 선교사가 거주했던 스미스 선교사의 집(후에 영서현교회의 효시가 된다), 의료선교사 어을빈의 주택과 현대식 의료병원인 전킨병원, 그리고 베어드 선교사의 사랑방(한문서당)이라는 설명이 첨부되어있는 사진이다. 부산에서의 기독교선교가 이루어지고 교회가 탄생되는 증빙 사진이다. 스미스는 의료선교사 어을빈과 함께 나환자를 돌보는 위원회의 위원으로 활약한 의료선교사다.
이 사진의 축대와 언덕바지, 산등성이로 보아 중구로의 영주동 코모도호텔 일원인 사진 퍌 와 일치한다. 즉 오른쪽으로 코모도호텔 부근에 어을빈 의료선교사의 병원(어을빈병원 퍃)이 있었고, 그 아래에 고용인 주택 퍂 , 그 위로 가장 높은 곳에 어을빈 선교사의 주택 퍁 이 있었으며 왼쪽으로 스미스 선교사의 주택(베어드 선교사의 주택 퍀), 그리고 베어드 선교사의 사랑방 한문서당(스미스 선교사의 집 퍆), 그리고 유진영사의 주택 팿 이 있었을 것이다. 사진과 부기된 설명으로 한창시절의 부산선교사들의 마을을 찾기란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수소문하여 그 위치들을 추적 고증할 필요를 느낀다. 문의 ▶부산민학회 255-5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