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구민이 주인되는 행복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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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카페서 책 읽고, 토요일엔 영화도 본다 ( 505호 )
문화공간 산책-보수동 책방골목 문화관
책방골목 역사 담은 `책 박물관'
6층 `북카페' 책 읽는 휴식공간
보수동 책방골목은 1980년대 70여 개의 책방들로 성업을 이루었지만 경제사정이 나아지면서 새 책을 선호하는 경향과 인터넷 서점의 등장으로 20여 개가 문을 닫았다. 이즈음 보수동 책방골목을 상업거리가 아닌 문화거리로 탈바꿈하려는 노력이 시작되면서 보수동 책방골목 활성화 일환으로 2010년 보수동 책방골목 문화관을 개관했다.
이 문화관은 지상 8층 연면적 568.85㎡ 규모로 1층에는 안내실이, 2층∼3층에는 책 박물관, 4층 다목적홀, 5층 사무실, 6층 북카페, 7층 어린이 책 사랑방, 8층 옥상정원으로 꾸며져 있다. 책 박물관에는 보수동 책방골목 역사를 담은 사진과 50년대∼70년대 유행했던 책과 당시 인쇄방법을 볼 수 있는 인쇄시설, 희귀도서, 책걸상 등이 전시되어 있어 보수동 책방골목의 유래와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3층 특별전시관에서는 10월 28일까지 `여인의 향기전'이 열리고 있고, 25일까지는 `책 고치는 할아버지'라는 주제로 복도전시실에서 책 그림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매주 수요일 7시 30분마다 4층 다목적홀에서는 상설강좌로 `20세기 미술여행'이라는 주제로 강좌가 열렸으나 공사로 인해 내년 2월까지 잠시 휴강한다. 토요일 오후 2시 마련되는 토요골목극장에서는 `반복되는 하루'라는 주제로 다양한 영화가 상영된다.
조정래 보수동 책방골목 문화관 사무국장은 "민주항쟁기념사업회 후원 공간으로 주민들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인데 아직은 주민들의 적극적인 관심이 부족한듯하다"며 "주민들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고 밝혔다.
좋은 공간은 활용하기 나름이다. 우리들의 관심이 우리의 공간을 살리는 길이라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문화관 1층 주차장 자리에는 앞으로 이 일대를 알릴 `관광안내소'가 들어설 예정이다. 화장실도 함께 들어서 보수동 책방골목을 찾는 관광객들이 보다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문화해설사가 상주하고, 보수동과 부평동의 관광시설을 안내하는 역할을 도맡아 할 것으로 보인다.
6층 북카페에는 많은 양서들이 방문객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책방골목을 지나다 북카페에 잠시 들러 독서의 계절 가을을 느껴보면 어떨까?
o교통:버스 40, 81번 책방골목 하차
o운영:화∼일 10:00∼18:00
매주 월요일, 공휴일 휴관
o문의:보수동 책방골목 문화관 743-7650
최매실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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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추천도서 ( 505호 )
아무 말 대잔치

아무 말이나 툭툭 내뱉던 찬우가 더불어 이야기하는 법을 알게 되었어요! 친구들로부터 `막말 대장'이란 별명을 얻는 찬우! 그가 친구들과 더불어 즐겁게 이야기할 날이 올까요?
홍민정 글/이주희 그림/좋은책어린이
시간을 복원하는 남자

한국에서는 아직도 낯선 분야인 복원가의 작업과 일상을 담담하게 서술한 책이 나왔다. 화가 김수익의 아들인 미술품 복원전문가 김겸의 작업과 일상을 담고 있다.
김겸 지음/문학동네/16,500원 자료: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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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자락 ( 505호 )
모과나무를 지나며
박진규
저 모과는 풋모과 시절부터
몸속에 어린 벌레를 키웠던 것이다
벌레가 나방이 되어 훨훨 날아갈 때까지
여린 속살을 먹여주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 천천히 새살이 차오르면서
할 수 없이 한쪽으로 불거졌던 것이다
1989년 `부산문화방송' 신인문예상, 2010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문탠로드를 빠져나오며'. `잡어' 동인. 현재 부경대학교 홍보부서 근무.
거둔다는 것, 거두어 먹인다는 것은 참으로 숭고한 행위 중 하나이다. 자신의 몸 안에 벌레를 오랫동안 키워 온 `모과'도 마찬가지다. 나무에 달린 한갓 못생긴 열매이지만, 이 자애로운 행위는 모과를 어느 것보다 아름다운 이름으로 남게 한다.
시인이 바라보는 `모과'는 자식을 극진히 보살피는 우리의 어미와도 다름 아니다. 자식에게 자신의 `여린 속살' 거둬 먹이다 보면, 어미의 모습은 `한쪽으로 불거진' 못난 모과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모든 것 놓아버린 어미의 극진한 희생으로 읽혀지는 대목이다.
그러나 못나게 불거진 어미의 몸피 안에는, 짙은 내면의 향기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 또한 아는 자식이 드물다. 진하게 퍼져나는 어미의 깊은 내리사랑은, 몸속에 벌레를 키우는 모과가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알기 때문이다.
최원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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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량객사 숙배례를 시작으로 외교사절 문을 열다 ( 505호 )
주경업의 중구이야기 57 영선고갯길 역사 돌아다보기 2 초량객사(현 봉래초등학교)

1896년 부산개성학교의 개교식 장면.
모든 외교사절 숙배례 올려야
초량객사 → 동래감리서 → 봉래초등
부산 최초로 설립된 공립학교
17∼19세기 조선과 일본의 외교는 조선통신사를 비롯, 일본으로 외교사절이 파견되었을 때와 일본의 사절(정기 및 임시) 등이 왜관에 와서 우리 측 외교관들과 교섭을 하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왜의 사절들이 서울로 가는 것이 금지되므로 일본사절을 위한 서울의 객관(동평관)도 폐쇄되고 만다. 그러므로 조선에서의 일본과의 외교는 유일하게 왜관이 존재하는 동래(초량왜관)에서만 이루어졌다. 양국 문서가 오가고 연회도 베풀어졌다. 이러한 외교의례 전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순서가 왜관 북쪽에 있는 초량객사에서의 숙배례(肅拜禮)였다. 숙배례란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임금에게 올리는 의례를 일컫는다.
객사(客舍)는 고려·조선시대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외국사신이 내왕할 때 머무르는 관사·객관을 이르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안치하고 매월 두 차례 전패에 절을 올리는 의식을 올렸다. 이를 숙배례라 한다.
초량왜관에 온 모든 외교사절은 반드시 초량객사에 와서 숙배례를 올려야 했고 거행되는 모든 의식절차는 조선의 방식대로 진행했다. 이런 절차를 그림으로 그려둔 것이 돻동래부사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돽(부산박물관 소장) 제7폭의 그림이다.
그림 하단에 청도기 등 깃발과 청선을 든 군관들이 말을 타고 앞장서서 초량객사에 이르고 있다. 아래에 누문이 그려졌고 중문사이에는 왜병사들이 긴 창을 들고 두 줄로 도열하였고, 동편에 우리 측 관군과 타고 온 말들이 보인다. 중문 안마당엔 돗자리를 깔고 왜사일행이 엎드려 숙배하고 있다. 객사정청(임영관) 가장 윗자리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가 붉은 보자기 위에 놓였고, 대청 위에는 진상물건으로 보이는 붉은 보자기로 싼 함이 두 개 놓여 있다. 진상품 좌우에 접위관으로 보이는 동래부사와 부산첨사가 나누어 섰고 계단 아래 객사건물 앞에는 붉은 우산과 각종 의장을 든 관원들이 서 있다.
초량객사는 오늘날의 봉래초등학교에 위치하였다. 객사는 정청과 동헌 그리고 좌익랑, 우익랑과 중문, 누문 등이 화려한 단청으로 단장되어 있었다. 객사를 수리할 경우 전패를 옮기는 봉안행렬은 실로 장엄하고 정숙하였다고 한다. 전패를 실은 가마가 서거나 멈출 때는 부사, 첨사, 임관 등 전원이 배례를 하였다. 서울 도성에서 임금이 거동할 때 나팔과 같은 울리는 악기조차 사용을 금했었다고 하는데, 부산포에서도 그와 똑같이 왕의 행차에 준하였던 것이다. 특히 초량객사는 왜인의 구경을 금하였으므로 필요시 동래부사의 허가를 얻어야만 가능했었다.
한편, 봉래초등학교는 1896년 3월에 개교한 부산개성학교(후에 부산상고)에서 비롯되었다. 개성학교는 1897년 정부로부터 공립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1907년 사립부산개성일어학교로 개칭한다. 그러나 이후 학교 재정이 어려워져 1909년 정부에 헌납하게 되었고, 이 해 공포된 실습학교령에 따라 공립부산상업학교로 개명되고 이 실업학교 구내에서 소학교 과정의 공립부산보통학교가 분리 설립되었다. 두 공립학교가 하나의 관리운영 체제 아래 같은 학교 구내에서 수업을 시작한 것이다(부산에서는 처음으로 설립된 공립학교였다).
공립보통학교는 1922년 오늘의 영주동에 있는 봉래초등학교 바로 그 자리에 객사를 헐고 교사를 신축하기 시작하여 이듬해(1923) 6월에 준공을 보아 공립부산실업학교의 더부살이에서 벗어나 독립된 학교(교사)를 갖게 되었다. 1924년에는 6개의 교실을 더 지어 여학생을 수용하여 같이 수업을 받게 하였다. 부산보통학교는 1938년 부산봉래공립심상소학교로 개칭하였다. 해방 후 1946년 봉래국민학교로 재개교하여 오늘에 이른다.
문의 ▶부산민학회 255-5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