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구민이 주인되는 행복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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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난 후 시작되는 극장? ( 499호 )
중구평생교육과 만나다 모퉁이 극장
영화교양강좌 `관객문화교실'
영화 인문학, 시민영화감상실
`영화 인문학' 강좌가 열리고 있는 모퉁이 극장(40계단길 7, 4층)을 찾았다.
4월 17일 에릭 로메르 감독 영화의 〈봄 이야기〉를 상영했다. 영화가 끝난 후 각자가 느낀 감정들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시간가는 줄도 모를 정도로 열기가 대단했다.
2012년 문을 연 모퉁이 극장은 에른스트 루비치(Ernst Lubitsch)의 영화 `모퉁이 가게(The shop Around the Concert)'에서 따온 이름이다.
관객문화 전용관인 모퉁이 극장 김현수 대표는 "어떻게 하면 관객들이 영화를 좋아하는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을까 고민하다가 찾은 답이 `관객문화운동'이었다"며 "관객이 단순히 소비자가 아닌 영화문화의 생산자로 거듭나는 것으로, 모퉁이 극장은 수동적인 관람에서 벗어나 다양한 방법으로 영화를 수용하고 사람들과 공유하여 관객을 영상문화의 주체로 만들고자 노력한다"고 말했다.
관객문화운동은 그늘에 가려져 있던 관객의 자리를 마련하고 그들이 역사를 기록하는 운동이다. 모퉁이 극장의 목표는 보는 사람들을 위한 교육과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한다.
익명이라는 그늘에 가려져 있던 관객들이 한 걸음 나와 능동적으로 영화를 수용하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고 관객이라는 이름 자체로 힘을 갖는 것, 일반 시민이 문화의 주인이 되는 것. 이것이 하나의 역사가 되어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것. 모퉁이 극장은 이 모든 일의 시작점에 서 있다.
모퉁이 극장은 영화라는 토양에 `관객문화'를 뿌리 내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 부산 시민을 위한 영화교양강좌 `관객문화교실'이 대표적이다. 관객문화교실이 배출한 관객 활동가들은 모퉁이 극장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기도 하고 영화와 관련된 다양한 활동들을 하고 있다.
또 서울국제실험영화제와 협력해 영화제의 주요 출품작을 상영하는 프로그램 `엑시코너스', 매년 말에 열리는 `모퉁이 관객 영화제' 등이 있다. 4월에 시작한 중구청 평생교육 프로그램 `영화 인문학'은 매주 화요일 저녁 7시∼9시 12주에 걸쳐 진행된다. 또따또가 프로그램 `시민영화감상실'이 5월 2일∼23일 매주 수요일 저녁 7시마다 모퉁이 극장에서 열린다.
영화를 본 후 느낀 감정을 함께 나눌 사람이 필요하다면 모퉁이 극장으로 오세요!
문의 ▶모퉁이 극장 468-1895 최매실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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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 내려다보이는 조망 명소 ( 499호 )
문화공간 산책-역사의 디오라마
속이 확 트이는 `전망'
카페 디오에서 차 한 잔
부산항의 모습을 환히 내려다 볼 수 있는 탁 트인 전망대가 있는 영주동 `역사의 디오라마(Diorama, 입체 축소모형)'. 시원한 풍광이 답답하던 가슴 속을 확 트이게 한다. 부산항대교와 빌딩 사이로 펼쳐지는 화려한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거대한 크레인과 끝없이 쌓여 있는 컨테이너가 역동적인 부산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까이 보이는 1968년 지어진 최초의 시영아파트인 영주아파트는 지을 당시 골조를 만들고 화장실과 주방 위치만 정해줬다고 한다. 집의 구조나 방의 크기를 입주민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 집집마다 구조가 다르다.
산복도로는 경사지를 개발하면서 산 중턱에 자리한 도로다. 부산의 어제와 오늘이 고스란히 담긴 곳이다. 동서남북으로 큰 길이 16㎞ 남짓이지만 얽히고설킨 골목들을 더하면 30㎞를 넘는다. 화려한 부산의 봄 야경을 즐기려면 산복도로가 그만이다. `역사의 디오라마'에서 보면 어려웠던 삶을 살았던 시절의 구불구불한 불빛이 정감있게 반짝반짝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역사의 디오라마 전망대는 야간명소 중의 명소다. 디오라마에서 바라본 용두산공원 부산타워는 형형색색 물든다. 미디어파사드 쇼는 봄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듯하다.
역사의 디오라마 전망대를 구경하고 나면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카페 `디오'가 바로 옆에 있다. 지난 3월 22일 산리협동조합에서 새로 개업했다. 아메리카노를 2500원에 마실 수 있다. 화∼일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9시까지 문을 연다. 전망대를 찾는 사람이 많은 주말에는 카페도 붐빈다.
김영순(69) 씨는 "산리협동조합에서 근무한지 4년이나 되었는데, 카페를 개업하면서 이곳에서 일하게 되었다"며 "저녁 시간에는 산책 나온 주민들이 가족과 함께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눈다"고 귀뜸해 주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전망대를 구경하고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전망도 즐기고 여유로움도 느껴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o교통:38, 43, 86, 186, 190, 508번 버스 이용 전망대 근처 하차
채명희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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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추천도서 ( 499호 )
호통판사 천종호의 변명

"아이들이 왜 이렇게 잔인해진 겁니까, 판사님?" 호통판사 천종호, 국민들의 소환에 응답하다. 학교폭력 문제에 대해 깊이 천착해 온 저자의 오랜 고민이 담긴 책.
천종호 지음/우리학교/15,000원 자료:남포문고
태평양을 건너간 사진신부

신랑의 사진만 보고 하와이로 떠나간 여성들을 `사진신부'라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하와이 이민생활과 실제 역사 속에 존재했던 사진신부에 대한 살아있는 역사를 어린이동화로 만난다.
윤자명 지음/김숙경 그림/밝은미래 자료: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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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자락 ( 499호 )
봄 비
원무현
어머니가 재봉틀을 돌리면
한겨울에도 봄비가 내렸다
살아 움직이는 거라곤 없는 거친 천 조각에
은빛 바늘이 지나가면
물빛도 눈부신 강이 굽이굽이 흐르고
강둑에서 물오른 나무들이 꽃을 하얗게 터트렸다
두부장수 요령소리 들리는 새벽이 오면
어머니는 밤새워 피워낸 십리 꽃길을 액자가게에 넘겼다
그런 날 저녁엔 고깃국이 오르고
배가 든든한 아이들은 잠든 사이에도 쑥쑥 자랐다
경북 성주 출생. 2003년 `시사사'로 등단. 시집 `홍어', `사소한, 아주 사소한', `강철나비' 현재 빛남출판사 대표.
예부터 어머니라는 존재를 `가없다'고 했다.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끝이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특히 자식에 대한 애정과 걱정은 사려 깊으면서도 맹목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다 보니 자식들에게 어머니란 존재는 산 아래 십리 마을을 거두는 열두 폭 치마의 `큰 산'이다. 겨울에도 봄비를 내리게 하고, 눈부신 강을 굽이굽이 흐르게도 하며, 물오른 나무들이 하얗게 꽃을 피우게도 한다. 굶고 있는 자식들을 위해 밤새 재봉틀 위에서 십리 꽃길을 피워내, 자식들에게 고깃국 저녁을 장만하고야 마는 우리들의 어머니… 5월이다. 바쁜 와중이라도 잠시나마, 부모님의 헛헛한 뒷자리를 살펴드려야 할 일이겠다. 최원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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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로 불리던 동양화가 1982년 `한국화라 일컫고 ( 499호 )
주경업의 중구이야기 51
광포동7080 9 동양화를 한국화로
천경자, 박생광 등 피란지 부산서
동양화 발전에 큰 파문 일으켜
광복·동광동 다방서 동양화 전시
70년대 서대신동의 경남교육청에 근무하면서 퇴근 때 자주 들렀던 주촌에 내걸린 `장기 두는 그림'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장 받아라!" 소리에 놀라 혼비백산하는 두 노인얘기를 그린 청초 이석우의 표현력이 뛰어난 그림이었다. 주인장은 그림의 진가를 모르고 그냥 외상술값으로 받아둔 그림이란다. 한편 80년 말 해운대 둥지유아원에 소장된 윤재 이규옥의 `참새그림'도 인상적이었다. 극사실적으로 그린 100마리의 참새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앉고 날고 퍼드덕거리는 그림이었는데, 두 그림 모두 부산 동양화단을 대표하는 최고 어른의 그림이었기에 그림을 보는 감회가 남달랐다. 서양화보다 동양화에 대한 인식이 높던 7,80년 당시대의 풍경이다. 더구나 전라도 출신 화가작품이 대중을 이루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동양화란 근대 이후의 우리나라 전통회화를 일컫는 말이었다. 조선시대까지 글씨와 함께 서화(書畵)로 지칭되어 오던 우리의 전통그림을 1920년경부터 새로 들어온 서양화와 구별하기 위해 동양화라 부르게 하면서다. 그러나 동양화는 우리 전통회화의 독자성을 고려하지 않은 일제강점기에 타율적으로 붙여진 명칭이기에 민족의식과 주체성이 없으며 민족예술의 특징을 보일만한 특성이 없다는 질책과 비난들이 쏟아지면서 1982년부터 `한국화'라 고쳐 부르게 된다. 1983년이면 개정된 미술교과서에도 한국화로 공식표기하게 된다. 중국의 남종·북종화의 영향을 받은 산수화 작품들과 수묵화가 대세이던 동양화에서 그림 주제의 선정이 자유로워지고 진경산수화와 추상계열의 새로운 미술운동으로 번져나갔다. 미술평론가 김강석은 전통을 고수하는 작품에서 근대적 사실작품이 등장하는 시기를 1960년 이후로 정리하고 있기도 하다.
1950년의 한국전쟁으로 부산의 동양화계에도 큰 바람이 분다. 피란 온 김은호, 남관, 변관식, 천경자, 박생광 등이 피란지 부산에서 펴온 작품경향이 부산 동양화의 발전에 파문을 일으켰다. 5,60년대 이후 허민, 이석우, 이규옥, 김지수, 오재수, 이형섭, 안상철, 김남배 등이 미공보원, 국제구락부, 미화당백화점(6층), 경남홍보관, 부산시공보관 등과 광복로 원커피, 극동, 천우, 사장실, 대호, AI, 보리수, 희, 덕창다방 등 광복동과 동광동 일대의 다방에서 동양화 전시를 연다. 몇몇 작가들은 광복로 일원에 화실을 내고 저녁이면 일대의 목로주점에서 그림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7,80년대에 이르면 각 대학들에서 서둘러 미술대학을 개설하고 작가지망생을 배출하는 바람에 동양화 인구도 늘고 작품발표의 횟수도 기하급수적으로 증대되어 70년 한 해 동안 동양화 개인전만 150회에 이르렀으며 광복로 입구 희, 보리수다방은 동양화와 서예전의 단골 다방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민들의 작품구매는 여전히 몇몇 이름이 알려진 윤재, 청초, 우당(김지수) 등의 그림이 선호되고 있을 뿐 다양하지 못했다. 간혹 서울의 잘나가는 작가들이 호텔 등에 숙소를 정하고 그림을 다량으로 생산(?)하여 부산에 풀어놓고 감으로 그나마 좁은 부산미술시장이 더욱 비좁게 느껴졌다.
80년 후반 대학교육에 한국화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소재와 재료의 선택이 자유로워졌고 이른바 전통산수화에서 벗어나 서양화에 못지않은 비구상화법도 나타나 서양화, 한국화의 틀을 깨트리기도 했다. 한국화의 일대 변혁시기였던 것이다. 도리어 이런 무질서해 보이는 그림운동이 한국화의 전통성마저 훼손될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일테면 화가라는 사람들이 그 흔한 화제(畵題) 하나 제 손으로 쓰지 못하는 우(愚)말이다. 이제 1세대 화가들 대부분이 별세하고 김재위, 이재진, 김종규, 이삼철, 박창연, 김수길, 김영길, 이양우, 허휘, 최추자, 김정남, 남운섭, 도재환, 박옥임 등 제2세대 작가들이 부산 한국화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
문의 ▶부산민학회 255-5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