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구민이 주인되는 행복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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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달의 추천도서 ( 491호 )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내가 여행과 관련해서 유일하게 되뇌는 점이 있다면, "예정대로 되지 않는 일을 받아들일 것." 오로지 그것을 더 여유 있게 경험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이다혜 지음/예담/14,000원 늘 그대를 사랑했습니다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이후 10년,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처럼 달달한 제목으로 독자를 유혹하는 우타노 쇼고의 최신작. 우타노 쇼고 지음/한스미디어/14,800원 자료제공:남포문고
- 마음의 자락 - 어촌점경〈 漁村點景 〉 ( 491호 ) 김창근 포구(浦口)에는 버려진 폐선(廢船)이 한 척 지친 고래처럼 누워 있고 해거름의 물길에서 늙은 어부가 도깨비처럼 돌아오면 마을에는 개 짖는 소리 하나씩 불이 켜지고 낡은 유행가의 목로주점 집어등(集魚燈) 불빛에 물귀신으로 돌아앉아 있다 부산 출생.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미납편지', `겨울에 세우는 묘비', `가나다시편' 등. 시전집 `단추를 달면서', 논저 `문학의 원리' 등 `봉생문화상' 수상. 부산시인협회 회장, 동의대학교 인문대학장 역임. 현 동의대학교 명예교수. 한적한 어촌마을에는 으레 고기잡이에 퇴역한 낡은 폐선 한 척과 저물녘 어선을 끌고 포구로 돌아오는 늙은 어부 하나, 알전구 깜빡이는 선창가의 목로주점 등이 등장한다. 게다가 땅거미 지는 바다를 향해 개 한 마리 컹컹 짖어대면, 잘 그린 그림 속 어촌점경이 완성된다. 여름 뙤약볕 고난의 바다일이 끝나고 나면, 저물녘 포구의 풍경은 적요하다 못해 인적 끊긴 도깨비 마을과도 같다. 모든 것이 고요히 쉬는 시간, 어부 몇몇 하루 일을 접고 목로주점으로 향한다. 물귀신처럼 어부의 지친 발길을 붙잡으며, 쉬어가라 쉬어가라 목로주점 불빛만이 깜빡이고 있는 것이다. 최원준 시인
- 그 때 그 시절 광포동은 부산문화의 르네상스였다 ( 491호 ) 주경업의 중구이야기 44 - 광포동 7080 (1) 해방 이후 광복동은 대만원 남포, 동광, 창선동 일부포함 다방은 미술전시장으로 DJ 음악실서 클래식을 명동보다 앞선 `패션거리 해방과 더불어 속속 귀국한 유학생들이 일본이 할퀴고 간 척박한 이 땅에 그들이 배워온 예술세계를 펼치기란 그리 쉽지 않았을 터이다. 뜻이 맞는 몇몇이라도 모여 예술을 이야기하고 꿈을 키울 마땅한 곳이 없었던 시절이었기에 찻집의 출현은 이들에게 상생의 물꼬를 터준 격이 되었다. 와중에 일어난 6.25동란은 전국의 내로라하는 예술인들을 부산에 쏟아붓듯이 모여들게 했었고, 부산사람들은 이들이 몰고 오는 예술혼을 반기며 그들을 위해 아랫방, 윗방을 내어놓고 마룻방도 내어놓았다. 식솔들일랑 한 칸 방에 밀어 넣으면서도 이들의 삶에 보탬이 되어 주었다. 이즈음 광복동은 만원이었다. 광복동은 남포동과 동광동, 창선동 일부까지를 아우르는 대광복동 시대였다. 우리는 이 시기를 광포동(광복동+남포동)시절이라 곧장 얘기해왔다. 한 집 건너 다방(찻집)이어서 문화예술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문화와 예술의 꽃을 피웠다. 그리고 죽이 맞으면 단골집으로 술추렴을 갔다. 호주머니 사정일랑 뻔해서 외상술을 반겨 할 주모가 있을 리 만무하지만, `내일 갚는다' 흰소리하며 마셔댔다. 어쩌다 봉(?)이라도 만나면 그 날은 땡잡는 날이었다. 남포동 거리가 비좁다 하며 광포동찬가를 불러댔다. 이럴 때면 으레 만나는 신문기자양반들에게 무슨 대단한 기삿거리를 감추고 있는 듯 괜스레 어깨 힘 줘 보이는 것도 그 시절의 낭만으로 보였다. 광복로에서 미술단체 전시가 열릴 때면 광복로의 다방은 모두 전시장이 되었다. 이른바 광포동예술시대였다. 그림 있는 찻집 곁에는 해설과 함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음악실도 있었다. 베토벤을 들으면서 짐짓 눈을 지긋이 감으면서 클래식마니아인양 폼을 잡기도 하고, DJ의 넉살에 어깨 들썩이면, "선생님, 어떤 음악을 좋아하세요?" 싱그러운 목소리가 찾아온다고 믿었다. 화가와 함께하고 시인과 나란히 앉으면 제가 무슨 그림 그리고 시를 읊조릴 줄 아는 예술인이 된 듯 착각하기도 했던 시절이다. 그러나 광포동의 밤은 이들을 따지지 않고 안아주었다. 술이 있고 예술이 있고 낭만이 있고 연인이 있어 마냥 좋은 밤으로 말이다. 광복 이후 광복로에는 야시장이 들어서기도 했으며 1970년도에는 차 없는 거리로 지정하여 문화예술의 거리로 만들기도 했다. 1989년 11월 27일부터 3일간 펼쳐진 `광복로 거리문화축제'는 광복로에 차량진입을 금하고 구)미화당백화점 앞(시티스폿) 중앙공연장을 비롯한 7개의 공연장에서 동시 진행된 노래자랑, 리듬댄스와 그룹사운드, 마당놀이, 연주공연 등은 광복로를 예술의 거리로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다. 광복로에서 익힌 패션감각이 몇 달 뒤 서울 명동거리에 선보이던 시대였다. 패션 못지않게 맞춤양복점이 성시를 이루었다. 당시 한국복장사의 큰 획을 긋던 상의원(上衣院)을 비롯한 쟁쟁한 양복점이 30여 곳 들어서 있었다. 이른바 유행의 중심에 광포동이 있었다. 비록 시청과 경찰청이 연산동시대를 연후 광포동이 빛을 잃어 예와 같지 않다고 하지만 역사와 문화의 현장은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도 부산을 얘기할 때 광복동과 남포동을 빼놓지 않는다. 향수를 아는 부산사람의 자존심을 만족시킬 구심점으로서의 개념에서 말이다. 이제 그 시절 그 때의 부산문화 르네상스시절의 광포동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그 시절을 함께 살아온 원로들과 함께 광포동을 걸으면서 함께 이야기하고 엮고 정리해보려 한다. 문의 ▶부산민학회 255-5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