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구민이 주인되는 행복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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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체험수기 당선작 - 최우수 버려진 아이(1950-1969년 일기) 한국전쟁, 되돌아보는 40계단전에 소개된 1950년대 체험수기부분 응모작품 총 26편이 경합을 겨뤄 지난 9월 9일 당선된 최우수, 우수, 장려 작품을 소개한다. 열흘 굶어 담장 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배고픔은 정말 견디기 힘이 들었다. 오빠와 난 늘 밥을 얻어먹지 못하였다. 어떤 때는 쌀이 없어 몇 일을 굶고 여는 때는 엄마와 아버지의 그칠 줄 모르는 긴 싸움 속에 예사로 굶주린 세월을 보내야 했다. # 생후 사십 팔개월 비 이십구 폭격기가 뜰 때마다 국방색 담요로 문을 가리며 호롱불을 껐다. 웅크리고 일어난 가랑비 오는 아침 눈이 부어 오른 엄마는 담배를 물고 있었다. 방문을 열고 내다본 황토 흙 마당에는 발자국에 찍힌 자국마다 누런 물이 고여 있어 나는 밤새 또 폭탄이 떨어진 줄 알았다. 엄마에게 어머니 밤새 또 폭탄이 떨어졌느냐고 물었더니 엄마는 그렇다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밤새워 피운 엄마의 담배꽁초가 흙탕물에 섞여 있었다는 것을… 바로 옆집에 사는 나보다 한 살 위인 사내아이 홍도라는, 동무는 나의 소꿉친구인데 그 애는 가끔씩 자신의 아버지 어깨에 무등을 타고 즐거워하며 놀았고 나는 그럴 적마다 도랑도 아닌 방안에서 장난감 꽃방망이로 마른 옷을 두들기며 늘 혼자 놀았다. 떠내려가지 않고 있는 생후 사십 팔개월. 낮이면 언제나 홍도와 같이 놀았지만 홍도가 그 애 엄마와 나들이라도 가고 없는 날이면 나는 집 옆을 타고 내리는 도랑물 건너 산비탈 비스듬히 내려 꺾인 둔둑 밭으로 가 비의 상처에 바르르 흐느끼며 떨고 있는 호박꽃을 본다. 무심코 드려다 본 꽃술도 언제나 혼자 있는 나를 왜 고개를 끄덕이며 쳐다보았을까? # 배가 너무 고파요 세상에 뭐니뭐니 해도 제일 서러운 것은 배고픔이 아닐까? 굶주려 보지 않은 사람은 그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모를 것이다. 여름은 여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늘상 가난에 허덕였다. 열흘 굶어 담장 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배고픔은 정말 견디기 힘이 들었다. 오빠와 난 늘 밥을 얻어먹지 못하였다. 어떤 때는 쌀이 없어 몇 일을 굶고 여는 때는 엄마와 아버지의 그칠 줄 모르는 긴 싸움 속에 예사로 굶주린 세월을 보내야 했다. 나는 비 소리를 무척 좋아했다. 비는 어쩐지 내 동무 같았다. 비 소리 속에 마음놓고 울 수 있고 나만이 이야기도 하는 버릇이 이때부터 시작이 됐다. 비가 오면 겨우 기어올라갈 수 있는 다락방에 들어 가 먼 신작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혼자 말로 이야기하는 것이 내 유일한 낙이었다. 하루를 꼬박 굶고 힘없이 일어 난 아침. 혹시나 엄마가 화가 풀려 밥솥에 밥이라도 해 놓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 살살 기어 내려오니 연탄불 꺼진 아궁이에 메마른 빈 솥만이 덩그렇게 놓여 있었다. 꼬르륵 꼬르륵 배가 너무 고팠다. 나는 소리 치고 싶었다. # 여 중학을 접고 중학교를 어쩔 수 없이 그만두어야 하는 우울하고 서러운 날이 이어지면서 마음 붙일 곳 하나 없는 생 가슴앓이는 바람이 불면 획획 날아가는 천막촌 하꼬방의 밤하늘을 긴 울음의 한숨으로 들어 마시며 눈가는 끝없이 젖어있었다. 엄마와 아버지의 뜻대로 공장에서 돈을 벌지 못한 나는 언제나 죄인처럼 눈치만 살피며 한 쪽 구석에 꿇어앉아 있거나 바람이 우는 부엌문에 기대어 뭐가 잘못인지도 모른 체 눈물을 훔쳐야 했다. 엄마는 끼니가 멀어지거나 돈이 궁할 때마다 이모에게 돈이나 쌀을 꾸어 오라고 후들어 보내지만 나는 너무 이모에게 성가시게 하는 것이 부끄럽고 미안한 생각이 되어 주저주저 망설이면 엄마는 고함을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치며 곪은 창자를 우짤기냐고 욕설하는 통에 하는 수 없이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는 이모에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냐고 걱정이 하늘만큼 닿아있었다. 가슴이 뛰면서 이모 집 앞에서 한참이나 망설이다 되돌아오고 싶지만 그런 나를 이모는 불쌍하게 여기며 눈물을 여러 번 훔쳤다. 이모 집 사촌들은 이모부의 극진한 사랑과 이모의 온화한 얼굴로 언제나 웃음꽃이 피고 끼니때마다 따뜻한 밥상머리에 마주 앉아 웃고 이야기하는 모습이 나는 한없이 부러웠고 그런 그들은 나와는 별개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종 사촌들은 지혜롭고 영특하여 일류 중학에 입학하여 다녔고 그들의 방안에는 참고서며 책들이 가득히 쌓여있었다. 너무나 생소한 수많은 책들이 부럽고 호기심에 나는 가끔 몰래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런 나를 이모는 언제나 가슴 아파 목메어 울기도 하였다. 중퇴를 하고 여러 공장을 헤매었지만 쉽게 들어 갈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순아 언니 이모가 보수천 검정 다리 옆에 편물점에서 털 목수건을 만든다고 빨리 가보라고 했다. 순아 언니와 나는 아침 일찍부터 열심히 다녔지만 그 일도 얼마 되지 않아 문을 닫아버렸다. 또 엄마와 아버지에게 얼마나 많은 원망과 부딛낌을 당할까 두려움을 안고 그간의 얼마 되지 않는 돈을 가지고 힘없이 돌아와 엄마의 눈치를 보며 살그머니 방문을 열었더니 엄마는 이불을 꿰매면서 화가 몹시 나 있었다. 여기 돈 입니더 하며 돈을 내 밀자 얼른 받아 솟곳 안주머니에 넣고는 돈도 얼마 벌지 못하는 곳에서 순아 하고 히히닥 거리며 놀지 말고 그만 두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며 이불 꿰매던 것을 내게 던지며 악을 쓰기 시작했다. 죄인 이었다 나는 돈 못 벌이는 죄인. 아무 소리도 못하고 대문 밖으로 나와 골목길 한쪽 귀퉁이에 앉아 버려진 나무 꼬챙이 하나 주워 흙바닥에 그냥 무엇인지 모르게 그려 됐다. 어디로 가야하나 어디로 가야하나? 나는 점점 더 용기 없고 주눅이 든 사춘기의 암울한 터널 속 깊숙이 빠져 밤이 늦게까지 잠을 설치며 눈물을 흘렸다. 흐르다 흐르다 목놓아 핏물이 되었다. 별이 울고 달도 울고 바람도 울었다. 나의 갈 길은 어디 있을까? 달도 별도 가르쳐 주지 않고 싸늘한 핏자욱 만이 흥건히 흘렀다. 누가 나를 이토록 서럽게 울리느냐, 하늘이야 땅이야 나를 좀 도와다오.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두 손을 입가에 막고 소리내어 울어도 컴컴한 어둠 속엔 누구도 오지 않았다. 울다 지쳐 스러진 내게 잡히는 것이 몽땅 연필 한자루 그랬다 이 눈물을 참고 견디려면 무언가 있어야 했다. 더듬더듬 집어 든 것이 돌가 종이(시멘트)종이 하나 그 위에 마구 써 내려갔던 것이 그날의 일기였다. 그냥 썼다 울분을 삼키며 조금이나마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인간은 막다른 골목길에 닿으면 필사의 탈출구를 찾기 마련인가? 일찍이 세상 밖으로 던져진 열네 살 계집아이는 엄청나게 밀려오는 핏물 같은 해일 속에 살고자 스스로 몸부림치며 숨 쉴 곳을 발버둥쳐 삶에 터득하려고 유일한 일기 쓰는 것과 공상과 망상 그리고 상상력을 위안 삼아 내 스스로 만들어 가기 시작하였다.
- 1950년대 체험수기 당선작 - `꿀꿀이 죽'을 아시나요! 미군의 주둔으로 `하야리아부대'라는 것이 생기게 되었고, 부두를 위시하여 곳곳에 미군의 막사가 들어섬으로써 그들이 식사하고 버린 `짬뽕(중국요리가 아님)'을 꿀꿀이가 먹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먹었다는 것이다. 이 `짬뽕'을 수거하여 속에 섞여 있는 이 물질을 걷어내고 콩나물 등을 넣어 간을 우리 식성에 맞게 맞추어 다시 끓이면 당시로서는 훌륭한 식사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꿀꿀이'는 돼지의 애칭이고, `죽'은 돼지에게 먹이는 사료이다. 피난 시절 `꿀꿀이 죽'을 사람이 먹었다면 지금 사람들은 잘 납득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해방의 기쁨으로 온 나라가 들뜬 지 얼마 되지 않아 6.25전쟁으로 국토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공산군의 남침에 대하여 UN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27일 공산군을 불법 남침으로 규정하고 한국전선에 UN군의 참전을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의해 제일 먼저 7월 1일 미군 제24사단이 부산항에 상륙해 7월 5일 오산에서 첫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전황은 점점 불리하여 서울이 함락된 데 이어 후퇴가 거듭되어 대구 북방까지 밀렸던 전선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수복, 38선을 돌파하여 평양을 함락하고 선발대가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조국통일이 눈앞에 보이는 듯 하였으나, 100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은 반전되고 1.4 후퇴로 다시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전선이 밀고 밀리는 동안 많은 피난민이 남하하여 부산에 모이게 되었다. 정부도 부산으로 옮겨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부산으로 집결되고 부산은 피난민과 실업자들로 가득하여 사회적 대혼란 상태였다. 인간에게는 하루 세끼를 먹는다는 즐거움이 있는 반면 먹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취약점을 동시에 안고 있다. 이와 같은 대혼란기에 피난민들은 하루 세끼의 끼니를 이어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며, `꿀꿀이 죽'이라도 먹지 않으면 살아 남지 못하는 절박한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 당시 피난민들의 생활 상황이었다. 미군의 주둔으로 `하야리아부대'라는 것이 생기게 되었고, 부두를 위시하여 곳곳에 미군의 막사가 들어섬으로써 그들이 식사하고 버린 `짬뽕(중국요리가 아님)'을 꿀꿀이가 먹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먹었다는 것이다. 이 `짬뽕'을 수거하여 속에 섞여 있는 이 물질을 걷어내고 콩나물 등을 넣어 간을 우리 식성에 맞게 맞추어 다시 끓이면 당시로서는 훌륭한 식사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이 짬뽕은 국수와 쇠고기, 계란, 돼지고기, 야채 등으로 혼합되어 있어 간을 맞추고 끓여서 열기소독을 하고 나면 영양분도 풍부하고 위생상으로도 별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중앙동을 위시하여 돗데기시장(지금의 국제시장)과 서면 등지에 피난민 등 실업자가 많이 몰리는 곳이면 거리에 지금의 포장마차와도 같이 솥을 걸고 `꿀꿀이 죽'을 끓이는 곳이 생겨났고, 피난민들이 이를 사먹었다. 특히 피난민들이 많이 모이는 중앙동 뒷골목에는 때가 되면 이 `꿀꿀이 죽'을 사먹기 위하여 포장마차 앞에 줄을 설 정도였다. 당시 중앙동에는 부산항의 하역인부를 주·야간으로 조를 편성하여 투입시키는 사무소들이 위치해 있어 사람들이 더욱 운집하였다. 이 `꿀꿀이 죽'도 나오는 양이 한정되어 있어 늦게 오면 매진되어 끼니를 굶게 되는 경우가 있어 줄을 서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꿀꿀이 죽' 한 그릇의 가격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으나 지금의 음식 가격에 비하면 500원 내지 1,000원 정도인 것으로 기억난다. 미군들의 상륙으로 `꿀꿀이 죽'뿐만 아니라 그들이 쓰고 버린 쓰레기를 비롯하여 군수물자들이 시중에 흘러나와 당시 우리 사회·경제에 보탬이 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들이 버린 깡통을 모아 이를 펴고 연결하여 판자촌의 지붕을 씌우는데 사용되었고, 군용전선은 빨래줄이나 노끈으로 쓰였고, `볼박스'는 펴서 판자집 온돌방 바닥에 장판대신 깔거나 이 박스로 의복을 담아두는 농장 대신 쓰이는 등 미군들이 쓰고 버린 물건은 하나도 버릴 것 없이 재활용되었다. 당시 피난민들의 생활상을 짐작 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뿐만 아니라 군에서 유출되는 휘발유 또는 부속품에 의해 버스나 트럭이 움직였고 폐차나 폐타이어 등이 재생산되어 합승버스가 운행되었다. 부두 하역작업을 통해 밀가루, 설탕 등 식료품과 군작업복, 사-지(모직품), 내의, 양말 등 의류품이 유출되어 암거래되는 국제시장 `양키골목'과 식품, 화장품 등이 거래되는 `깡통골목'이 생겨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미군들의 참전으로 새로운 직업들이 생겨났으니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이 통역이었다. 당시 통역은 대부분 영어에 소질이 있는 학생들이었는데 영국식 또는 일본식 발음으로 영어를 배운 당시 학생들은 미군들의 말을 알아듣는데 애로를 느꼈다. 예를 들어 물(water)을 `워터'로 배웠는데 미군들은 `워러'로 발언하니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했다. 이들 통역학생들은 뒤에 시험과 군사훈련을 거쳐 통역장교로 임관되어 미군사고문단에 배속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미군 막사에서 심부름을 하는 `하우스보이'와 구두를 닦는 `슈샨뽀이'등 새로운 직업들이 생겨났으며, `슈샨뽀이'는 6∼70년대 다방과 거리의 구두닦기를 거처 지금은 든든한 직업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서울이 다시 수복되고 휴전협정이 체결될 즈음인 1953년 6월 수도가 서울로 환도함에 따라 피난민들은 속속 귀향하게 되었으나 월남 피난민들은 갈 곳이 없어지게 됨으로써 그들은 국제시장 등지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장사 등 생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물러설 곳이 없는 그들은 억척스럽게도 노력하고 아끼고, 저축하여 점차 사업 규모가 늘어나게 되었고, 60년대부터는 국제시장 상권을 대부분 거머쥐게 된 것이다. 당시 중구는 명실상부한 부산의 중심지로 경제적인 측면에 있어 중앙동에는 해운, 무역, 항만 등 사업자들이 몰려들었고, 동광동은 은행들이 밀집된 금융의 거리로 제도권의 금융뿐만 아니라 사채, 암달러 등 거래가 활발하였으며, 광복동은 임시수도 당시 태양다방을 중심으로 정치인들이 모였고, 남포동은 음식업이 집중되어 있어 특히 외항선원 등 `마도로스'들이 최고 인기를 누렸다. 60대가 넘은 분들은 그때 그 시절, 중앙동과 광복동, 남포동의 풍요로운 기억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될 것이다.
- 1950년대 체험수기 당선작 - 참담했던 피난길과 피난생활 피난민의 형편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그나마 취직을 한 사람들은 나은 편이었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잘 곳이 없어서 산 속의 굴로 찾아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을 지경이었다. 광복동 일대에도 건물이라곤 드문드문 있을 뿐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다. 1950년 12월 4일, 나는 두 번 다시 밟지 못하게 될 고향을 떠나왔다. 감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던 평안남도 진남포, 1·4후퇴 전이었지만, 이미 중공군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고 남정네를 시작으로 하여 마을 사람들의 대부분이 고향을 떠나고 있었다. 그때 서른 하나의 나는 가족도 없는 홀홀 단신이었다. 보호해 줄 가족이 없기에 더욱 떠나야했지만 멀고도 긴 여정의 길을 여자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무리였었고 또한 두려움도 컸었다. 그렇게 며칠을 미적거리고 있는데, 어느 날 친구가 찾아오더니 같이 떠나기를 청하는 것이었다. 친구도 여덟 살 난 딸과 세 살박이 아들이 있을 뿐 홀로이기는 마찬가지였었다. 두 여자가 가족처럼 서로 의지하며 길을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여 명주 저고리에 깨끼옷을 입고 버선까지 두툼하게 신은 우리는 쌀 닷 되씩을 지고 길을 떠났다. 서울까지는 80리라고 누가 그랬던가? 하지만 오면서 들리는 마을마다 물어보아도 한결같이 서울까지는 80리라고 하는 통에 길은 줄어든 기색이 없이 아득하게만 느껴졌었다. 게다가 어린아이들까지 있어서 걸음은 느리고 설상가상 쌀도 금방 떨어져버렸다. 중간 중간 마을로 들어가 피난을 떠나지 않고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쌀이며 당장 필요한 것들을 사기도 했지만 곧 벌어질 싸움 때문인지 인심이 무척 사나운 편이었다. 고향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을 견뎌야만 했었다. 가져간 쌀이며 돈으로 배고픔은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지만 추위는 정말로 참기가 힘들었다. 낮이며 밤이며 가릴 것 없이 걸어다닌 탓에 두툼하게 신은 버선은 어느새 헤어져 발가락이 삐죽이 보일 정도였고 손이며 어깨며 어느 한 곳이랄 것 없이 죄다 동상에 걸려 살들이 짓물러 있었다. 그렇게 이십 일을 걸려 도착한 서울은 한산하기가 그지없었다. 이때에도 벌써 서울 사람들은 부산으로 떠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같은 고향분으로 철도 순경을 하고 계시던 분을 찾아 서울역으로 갔다. 다행히 그 분은 떠나지 않고 계셨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없는지 철도 관사는 텅 빈 채였다. 우리는 그분의 도움으로 텅 빈 관사에 일주일간 머무를 수 있었고, 그나마 얼마간이라도 다리를 쭉 뻗고 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서울에 마냥 있을 수만은 없었다. 부산까지 내려가야 안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다시 고향 분의 도움으로 그야말로 인산인해인 발 디딜 틈도 없어 지붕 위에까지 사람들이 들어찬 기차를 겨우 탈 수 있었다. 그때 부산역 앞마당은 갈 곳 없는 피난민들의 집결지인 것처럼 보였다. 한쪽에서는 이북에서 온 피난민들이, 다른 쪽에는 서울에서 온 피난민들이 또 다른 쪽에서는 한국인 남편을 둔 일본 여자들이 한데 모여 서 있었고, 거적때기를 깔고 깡통에 밥을 지으며 아예 살림을 펼쳐놓은 곳도 부지기수였다. 그 한 가운데에서 우리는 어디로 발걸음을 옮겨야할지 가늠도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살 곳도 먹을 것도 없었으니, 목적지인 부산까지 오긴 왔으나 그저 망막하기만 했던 것이다. 당장 일자리가 필요했다. 고향에서 떠나올 때 수중에 얼마간의 돈을 가지고 오긴 했으나 도중에 북한 돈을 가지고 있으면 반공이라며 처벌을 받는다고 하여 산 속에 버리고 왔기에 그야말로 돈 한푼 남아있지가 않았다. 친구는 아이들 때문에 일자리를 구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거제도에 있는 피난민 수용소로 찾아갔다. 그리고 나는 다행히 동광동에 있는 지금의 부원아파트 근처의 `한성관'이라는 식당에 취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피난민의 형편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그나마 취직을 한 사람들은 나은 편이었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잘 곳이 없어서 산 속의 굴로 찾아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을 지경이었다. 광복동 일대에도 건물이라곤 드문드문 있을 뿐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다. `한성관'이라는 식당에서는 거의 일 년 정도를 일했었다. 손등이 터서 갈라져 피가 흐를 정도로 힘들었었지만 나는 그 일년 동안 식당에서 먹고 자는 것 외에 사천원의 돈을 모으기도 하였다. 피난민 수용소로 간 친구와 아이들은 더욱 형편이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배급이라고 나온 것이 멀건 죽으로 세 숟가락 먹고 나면 없을 정도로 형편이 없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틈틈이 바닷가로 나가 담치나 파래를 뜯어와서 반찬거리로 장만하기도 했었단다. 보기에도 거기에 더 있다가는 친구와 아이들 모두 굶어죽을 것만 같았다. 나를 쳐다보는 친구의 눈빛에는 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나는 식당을 그만두고 우선 우리가 살집을 구하기로 하였다. 사실 사천원 가지고는 판잣집조차 구할 수가 없었다. 당시 부두 근처에는 피난민들이 만들어 놓은 판잣집이며 천막집 가마니집까지 한데 섞여 다닥다닥 게딱지처럼 붙어있었다. 우리는 제3부두로 갔다. 그곳 빈자리에다가 기둥을 세우고 가마니를 뜯어서 둘러쳐 벽을 만들고 시커먼 기름칠을 한 미군 박스를 천장에 올려 세웠다. 지금에서야 상상도 할 수 없는 집을 만든 셈이었다. 하지만 피난 와서 우리가 처음으로 마련한 집이었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쉴 수 있는 집이었다. 집을 마련함과 동시에 생애 첫 장삿길로 들어선 것도 이때부터였다. 장사를 시작하면서부터는 고향도 잊은 채 살기에 바빠 어느 덧 여든여섯의 나이까지 오게 된 것이다. 복이라면 복이랄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아직까지도 눈만 감으면 고향산이 가물하게 잡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