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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민이 주인되는 행복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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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정은 역사 속에 부활하고 사학자 김인덕의 문화유산 답사기 〈2〉 `불사이군'목은 문헌서원 참배하고 청산리전투 김좌진장군 생가 찾아 5월 28일 아침 5시에 일어나 식사와 출발준비를 하고 7시에 목적지인 서천군 문헌서원을 향해 출발하였다. 한산면 사무소에 도착한 시간이 8시. 한산은 조선시대의 고을이었으나 1914년 비인과 함께 서천군으로 통합되었으며 이곳에서는 한산 이씨가 명문이다. 면사무소 주변에 3∼4기의 고분이 자리해 있고 그 뒤편에 고려조 호장을 지낸 한산 이씨 시조인 이윤경공의 묘가 잘 단장되어 있었다. 문헌서원은 이곳에서 서쪽으로 4㎞ 거리에 있다. 서원은 산록의 광활한 경사면에 자리해 있으며 목은선생의 영정을 모신 영당과 1969년 복원한 서원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서원에는 고려 3은의 한 분인 이색선생을 위시하여 고려말의 학자 이곡, 이종학, 이종덕 선생 등 한산 이씨 명현들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서원 옆 남향으로 자리해 있는 목은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였다.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의 충정으로 지조를 굽히지 않은 선생의 충절을 6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의 규범으로 삼고 있으며 후손들은 제향을 거르지 않고 있다. 서천으로 나와 서해안 국도를 따라 대천시에 이르러, 대천에서 부여 방면으로 10㎞ 내륙에 있는 성주사지를 찾았다. 첩첩산중에 있는 성주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되었으나 통일신라시대에 크게 중창하였으며 지금 사지에는 5층 석탑과 3층 석탑 3기, 석등 그리고 최치원 선생이 비문을 지은 낭혜화상 탑비가 있다. 이 비는 높이 4.55m의 거비로 이수와 귀부가 장엄하여 국보 제8호로 지정되어 있는 보기 드문 큰 비석이다. 금당지 앞에는 5층 석탑이 세워져 있고 금당지 뒤에는 3층 석탑 3기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 석탑재치로 3층 석탑은 모두 이중 기단 위의 3층 석탑이며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양식이다. 성주사지에서 나와 국도변 계곡에 있는 산장식 식당에서 중식을 하였다. 신록으로 가득한 주변 산세를 관망하며 즐거운 식사를 하였다. 중식을 마치고 부여방면 국도를 10㎞ 정도 가다가 왼편 옆길로 들어갔는데 이곳은 보령군과 부여군의 경계인 산악지대로 산새가 수려하였다. "만수산 무량사"의 현판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 사찰의 경내에 들어서면 장엄한 모습의 5층 탑과 그 뒤에 자리한 2층 목조 건물인 극락전의 장중함에 압도된다. 이곳에는 매월당 김시습 선생의 부도가 있어 유명하다. 김시습은 세조가 어린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세상을 비관, 읽던 책을 모두 불사르고 중이 되어 수락산, 금강산, 설악산, 경주 금오산 등지로 방랑하며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금오산에서 한국 소설문학의 선구가 된 "금오신화"를 저술하였다. 만년에 깊은 산속인 이곳 무량사에서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인들은 선생을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추앙하고 있으며 선생의 부도가 이곳 무진암 입구 부도군 속에 자리해 있다. 무량사를 뒤로하고 계곡을 빠져나와 김좌진장군의 생가를 찾았다. 갈산면 행산리 일대는 안동김씨의 집성촌으로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가 이 지역까지 미쳐 해방 직후까지 타성들은 크게 숨도 못 쉬고 살았다는 이곳 관리소 직원의 말이었다. 그러나 백야 김좌진장군은 18세 때 가노를 모두 해방시키고 이들에게 전답을 나누어주어 자유롭게 살게 하였으며 사립 호명학교를 설립, 개명에 앞장선 선구자였다. 이와 같은 민족사랑과 원대한 포부는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는 청산리대첩을 이룩하게 된 것이다. 1991년부터 생가를 복원하기 시작하여 2001년 사우인 백야사를 세워 장군의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생가 경내에는 백야기념관과 사적비도 세워 조국 독립을 위하여 평생을 바친 백야장군의 업적을 길이 후손들에게 전하고 있다. 덕산 도립공원 내에 있는 수덕사는 비구니 사찰로 일엽스님의 "수덕사의 여승"이란 노래로 유명하다. 그의 본명은 김원주로 23세에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시인으로서 신문화운동과 여성운동에 앞장섰으며 화가 나혜석과 더불어 숱한 화제를 남겼는데 38세에 만공스님의 설법에 매료되어 불문에 귀의하여 이곳 선경암에서 76세로 입적하였다. 오늘도 이곳에는 그의 뒤를 따르려는 수백 명의 비구니들이 인간의 번뇌를 끊기 위하여 정진 수도하고 있다. 수덕사는 고려 때 중창한 국보 제49호인 대웅전을 제외하고 거의 전 건물을 최근에 중창하여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수덕사를 나와 인접해 있는 윤봉길 의사의 사당을 참배하였다. 윤의사는 이곳에서 태어나 1930년 "장부 출가 생 불환(장부가 한번 집을 나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이라는 명언을 남기고 상해에서 김구선생의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 개최된 천장절 행사시 단상에 폭탄을 던져 시라가와대장 등 일본 대륙침략의 거두들을 살상한 의거로 중국 대륙을 놀라게 한 분이다.
- 아 버 지 최인옥(영주2동 주부)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 속에선 언제나 담배 냄새가 난다. 겨울날 놀다 지쳐 방문을 열고 들어서면 구수한 냄새가 밀려왔다. 싫다하고 도망가는 막내딸을 무릎에 앉혀 까실거리는 턱을 눈물이 맺힐 때까지 부비셨다. 소주라도 한잔 더 하신 날엔 큰손 가득 얼굴 잡혀 하고 싶지 않은 서울 구경을 몇 번이나 해야 했다. 목 줄기와 귀가 떨어질 듯 해도 얼굴 가득 담배냄새를 묻혀두고 눈 흘기는 딸년을 놓아 주셨다. 그 때 훅하고 밀려오던 아버지의 웃음 이제 굵은 손가락 사이에 세월처럼 배어있던 흔적도 떠난 지 오래지만 오늘만은 무릎 맞춤 해 앉아 아버지, 두 손에 얼굴 묻고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습니다.
- 황석영님의 `모랫말 아이들'을 읽고 채명은(여성명예기자) 오랜만에 서점에 가서 읽을 책을 사고 식탁에 앉아 책을 읽으며 왠지 끊어진 필름처럼 10년이란 시간이 편집 되버린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책이 내게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나를 말해 주는 듯 하다. 뭐가 그렇게 바빴을까… 모랫말 아이들을 읽으며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 멀지 않은 얘기들이다. 우리들의 할아버지, 할머니 또는 부모님들의 누렇게 퇴색된 사진과 겹쳐보면 누구라도 그 시절을 꿈결처럼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6·25전쟁 직후에 보통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 세월이 가도 잊혀지지 않는 사람 냄새가 나는 그런 이야기들이 고스란이 담겨져 있었다. 책을 읽으며 작가의 말처럼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느껴지고 동심으로 찾아든다. 마지막 `잡초'편에서는 힘겹게 살아가는 태금이 누나에게서 급박하게 돌아가는 그 시절을 잘 느낄 수 있다. 전쟁으로 인해 생의 극과 극이 이어지다가 끝내는 정신을 놓고 무표정한 얼굴로 동네를 떠도는 모습들이 나중에는 사람들 눈에도 별스럽지 않게 보여지며 잊혀져 가고 세상은 또 그렇게 그렇게 돌아가는 가슴 한 곳이 따갑게 느껴지는 대목이였다. 작가는 당신 자식들에게 자신의 유년시절을 들려주고 싶은 마음에 이 글을 쓰게 되었고 중도에 여러 사정으로 그쳐 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몇 편되지 않는 글에서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얘기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책은 모든 상상력에 기본이 된다. 특히 청소년기에 읽었던 책들은 그 사람의 평생을 좌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나 자신을 위하여 오늘도 여러 마을과 거리 모퉁이에서 살아낸 시간을 기억하고 싶다."라고 말한 작가의 의도를 생각하며 이 책을 읽으면 더 큰 감동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어려운 시절을 열심히 살아오신 부모님들의 삶을 짚어보고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 바람은 변덕쟁이 광일초등학교 3년 김현우 봄에 부는 바람은 내 마음 설레이게 만드는 그런 바람이고요 여름에 부는 바람은 내 마음속 시원하게 해주는 좋은 바람이래요 가을에 부는 바람은 낙엽 살짝 꼬집는 서늘한 바람이고요 겨울에 부는 바람은 내 마음을 꽁꽁 얼려 버리는 얄미운 바람이래요 때론 화내고 때론 방긋 웃으며 장난 칠때도 있지만 나는 나는 그런 변덕스런 바람이 참 좋아요
- 즐거운 비 시온어린이집 방아람(7세)
- 무서운 비 시온어린이집 안경덕(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