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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량마을에 일본어 역관, 소통사들 살아
  • 490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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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업의 중구이야기 42 - 임소와 조선인 마을 `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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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소, 일본어 통역관 사무소 초량마을, 객사 정문 앞쪽에 소통사들 왜관일본인과 밀착 초량촌, 매춘·밀무역 등 온상  `임소'(任所)는 초량왜관(1678∼1876) 때 동래(부산)의 일본어 통역관(왜학역관)이 근무하는 집무소여서, 일본인이 업무상 자주 찾는 곳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양국의 역관끼리는 남다른 친분이 쌓이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 임소의 위치는 초량객사(지금의 봉래초등학교) 정문 앞(남쪽)의 산능선이 시작되는 경사진 곳에 있었다. 임소와 왜관 사이에는 복병산이 있어서 왜관에서 임소로 갈 때는 해안길(지금의 영선고갯길)이 아니면 복병산을 넘어서 다녀야 했는데, 거리가 가까워서 오가기가 어렵지 않았다(1825년 오다이 쿠고로·小田幾五郞가 쓴 『초량화집』에는 왜관에서 임소에 이르는 길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일본어 통역관인 훈도와 별차는 통역은 물론 일본과의 무역업무 등 일상실무까지 모두 감당하기에 업무가 너무 벅찼으므로 이들을 보좌하는 동래지역 현지 출신으로 보조통역관을 두었다. 이들 하급 통역관을 소통사(小通事)라 하였고, 근무처를 통사청이라 했다(통사청은 후에 유원각이라 했으며, 『증정교린지』는 소통사를 17종류에 40명이라 기록하고 있다).  임소와 초량객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을 `초량촌'이라 했는데, 이들 소통사들이 주로 살았다. 초량촌을 일본인들은 언덕 아랫마을이라 하여 `사카노시타'(板の下) 또는 `사카노시타무라'(板の下村)라 부르면서, 훈도와 별차집에 일본인이 왕래하는 것을 허락하고 있다. 일본인은 이를 핑계로 초량민가를 자주 출입하였다. 한편 소통사들은 `자신들은 조선인이지만 오로지 대마도를 위해 일한다'고 할 정도로 왜관일본인과 밀착되어 있었고 조정마저 이들 소통사를 `일본인 심복'으로 여길 정도였다.  1709년 당시 초량촌은 초량왜관 관계 속에서 70∼90호나 되는 큰 마을로 발달되어 있었으며, 일본인의 왕래가 잦은 만큼 불미스러운 일도 많은 마을이었다. 왜관 수문 밖 5리에 있어서 훈도와 별차의 집에 말을 전한다는 핑계를 대며 출입하다가 점차 밤낮없이 초량촌에 머무는 경우가 많아졌다. 초량여인과 밤낮으로 섞여 지내므로 불법통행에 따르는 정보유출과 잦은 싸움 그리고 매춘·밀무역 등의 온상이 되어갔다.  초량촌 남자들은 일본인의 사환노릇을 하는 등 경제적으로 유착되어 있었고, 여자들은 아침시장(朝市)에서 일본인과 `단골'관계를 형성할 정도로 친밀하였다. 초량촌민의 집에 일본인이 늘 머무는 것은 아니지만 초량인 가운데에는 일본인에 대해 `접주인'(接主人)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동래부사 권이진(부임기간 1708∼1709)은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출입이 잦고 초량민과 친밀한 일본인 4∼5명을 찾아내어 이들을 곤장으로 다스리는 등 통제의 본보기로 삼기도 하였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훈도와 별차 공간과 초량민의 공간을 분리시키는 것으로 통제를 강화해가야 했다. 훈도와 별차 집 담장과 바닷가를 연결하는 곳에 담장을 쌓고, 1709년에는 초량왜관 북쪽 밖 설문(設問)을 쌓았다. 그리고 초량촌 92호를 설문 밖으로 이주시켰다. 이주해간 초량을 `신초량'이라 했다. 오늘날 동구에 있는 초량이다.  조선시대 초량은 원래 지금의 중구 영주동에 있었던 것이다. 1727년 역관 현덕윤(玄德潤)에 의해 훈도가 근무하는 성신당(誠信堂)과 별차가 근무하는 별차청 빈일헌(賓日軒)이 건립되었다. 문의 ▶부산민학회 255-5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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