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업의 중구이야기〈6〉- 용두산 공원(중)

1915년 11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용두산을 대대적으로
재정비하기에 이른다.… 1935년 이후 용두산신사는
부산지방에서 신사참배의 중요거점이 된다.
용두산은 그 옛날 짙푸른 해송들이 울창하여 송헐산이라 불렸다. 1678년 용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초량왜관이 설치되었으며 1876년 부산항이 개항되면서 이곳 일대는 일본인의 전관거류지가 되어 일본거류민의 세상이 된다. 이즈음 대마도주 쇼오 요시자네(宗義眞)는 용두산 위에 작은 사당(小祠)을 설치하여 그들 속신(俗神) 항해수호의신 금도비라대신(金刀比羅大神)을 모셨으며(1678), 이후 `용두산신사'로 이름을 바꾸고(1899) 신공왕후대신을 비롯한 여러 속신을 함께 모신다.
1915년 11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용두산을 대대적으로 재정비하기에 이른다. 용두산 정상을 깎아 내려 610평의 대지를 만들고 아래쪽(이순신장군 동상 주변)에 있던 용두산신사와 사무실을 옮겼다. 그리고 중단(220평), 하단(1,100평)의 3단 계단식으로 용두산 모습을 재정비하였다. 용두산으로 오르는 4개의 진입로도 정비하였다. 신사사원규칙을 공표한 조선총독부가 신사의 건립을 장려하고 신사참배를 강제하려 할 때 부산에서는 용두산을 재정비하면서 신사를 가장 높은 곳에다 모셨던 것이다. 1935년 이후 용두산신사는 부산지방에서 신사참배의 중요거점이 된다.
1936년 8월 신사제도에 관한 5건의 칙령발표가 있었고, 이와 때를 맞추어 용두산신사는 경성신사(서울 남산)와 함께 국폐사(國弊祠)로 격상되었다.
신사건물은 건물 앞쪽에 해태 한 쌍이 서고 신사건물 귀퉁이 약수터처럼 보이는 곳으로서 손을 씻는 데미즈야(水洗所) 등이 있으며, 이런 동선 뒤에 일반 참배객들이 절을 올리고 소원을 비는 배전(拜殿)이 있고, 배전 뒤 깊숙한 한 단 높은 곳에 신사의 제신과 제신을 상징하는 예배대상물 등 다양한 신체가 모셔진 본전이 있다. 본전은 일반 참배자들의 출입 금지 구역이었다.
식민지 조선에서의 신사참배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내선일체의 황민화정책(조선인을 일본인과 똑같은 일본국민화 한다는 정책) 속에서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혹독하게 강요되었다. 관공서는 물론이고 초·중등학생에 이르기까지 천황숭배를 비롯한 각 신사에 모신 여러 신들에 대한 경신사상(敬神思想)이 생활 곳곳에 침투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한국인에게서 신사는 한국인들의 정신과 영혼을 짓밟는 귀신들의 전당 이상의 것이었고, 특히 기독교인들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십계명)을 어기게 되는 원인제공처여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목사들이 투옥되고 심지어 순교당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용두산신사는 해방후 1945년 11월 7일 민영석(당시 37세)에 의해 불태워 진다. 지금의 용두산에서 용두산신사 위치를 찾으려면 「용두산신사 부근 평면부 배치도」(6000분의 1 지도)를 보아야 한다. 배치도에 의하면 배전의 위치는 지금의 기념상품매장(2층은 용두산 갤러리)으로, 본전은 부산타워 건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신사란 본전이 있는 위치를 말하는 것이다(부산탑의 뒤쪽으로 돌아가면 타워를 세우기 위해 조성된 엄청 두터운 시멘트층이 보인다. 신사는 이 시멘트층 아래에 터를 일구고 있었다).
문의:010-8224-5424 부산민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