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구민이 주인되는 행복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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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자락 - 쑥국을 끓이며 ( 450호 ) 장춘숙 부평동 시장 좌판에 노지 시금치, 전구지, 취나물, 쑥이라고 묵은 계절을 털어내는 글귀 쑥 한 소쿠리, 된장 풀어 바지락과 들깨가루로 봄을 끓여 낸다. 지금쯤 고향뒷산 언덕배기에도 여린 쑥들 속살거리겠지. 어릴 적 쑥 뜯던 기억이 아슴한 동화 같네. 저녁 밥상에 둘러앉은 식구들의 웃음 속 달콤한 봄 햇살과 아릿한 쑥향이 봄꽃처럼 피어난다. 부산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과 졸업. 2011년 계간 시전문지 〈시의나라〉 등단. 어느새 화사한 새 봄이 우리 곁에 다가와 앉아있다. 부평동 시장 통에 널려있는 봄의 전령사 같은 온갖 봄나물들이 아낙네들을 반기고 있다. 겨울 내내 숱한 추위와 비바람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봄을 일으켜 세운 쑥의 위대함이 돋보인다. 오늘 저녁, 온 가족이 식탁에 모여앉아 쑥국과 함께 봄의 향연에 취해봄이 어떨까. 류명선/시인
- 4월 5일 백년어서원 `조선의 책, 오늘의 책' 강연 ( 450호 ) 백년어서원이 개원 5주년을 맞아 4월 5일 오후 3시 가톨릭센터 대강당에서 `조선의 책, 오늘의 책'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펼친다. 이날 민족주의가 대한민국의 국학에 어떠한 질곡이 되었는가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강명관 교수가 특별강사로 나선다. 조선의 지식인들도 서양 못지않게 책을 향한 무한한 열정을 품었다. 우리 선인들이 남긴 조선의 책으로 독서 문화사를 짚어보면서 현재의 우리 독서에 대한 물음과 답을 제시한다. 문의:백년어서원 465-1915
- 부산근대역사관 특별초청강연회 ( 450호 ) `해은일록'이 가진 역사적 가치 조명 부산근대역사관은 2005~2013년까지 9년간 진행했던 `해은일록(海隱日錄)'의 탈초·국역 사업의 성과를 조명하고 해당 유물의 역사적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2014년 근대역사관 특별초청강연회'를 3월 26일 개최한다. 이날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동아대학교 사학과 이훈상 교수가 부산박물관 소강당에서 `구한말 전라도 해남 출신의 무관 민건호와 감리서 근무 그리고 그의 일기 해은일록'이라는 주제로 강연한다. `해은일록'은 고종대의 무관 민건호(1843∼1920)가 1883년부터 1914년까지 30년간에 걸쳐 작성한 일기이다. 문의:부산근대역사관 253-3845
- 산복도로 이야기와 만난다 ( 450호 ) 5월 말까지 백산기념관서 전시 백산 안희제 선생의 숭고한 애국애족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백산기념관에서 제95주년 3.1절을 기념하여 `산복도로 이야기전'을 선보인다. 3월 1일부터 5월 30일까지 부산광역시 창조도시본부 후원으로 열린다. 이번 전시회는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피란시절의 애환과 60∼70년대 도시개발 시기에 이르기까지의 소중한 기록 36점을 전시한다. 중구의 산복도로 주변 변천사진 등 사진물 30점과 패널 6점을 만날 수 있다. 다시 조명 받고 있는 산복도로의 옛 모습과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문의:문화관광과 600-4042
- `사의 찬미'와 더불어 악명 높았던 관부연락선 ( 450호 ) 주경업의 중구이야기〈2〉관부연락선 "철도운송 수단과 해상운송수단을 연결시킨 배라하여 관부연락선이라 불렀다" "광막한 세상을 달리는 인생아/너는 무엇을 찾으러 왔느냐/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한 때 7080세대를 감동시킨 조선의 소프라노 윤심덕이 부른 `사(死)의 찬미' 노랫말이다. `사의 찬미'는 루마니아 작곡가 이온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 잔물결' 선율에 작곡가 김우진이 노랫말을 붙인 것으로, 이루지 못한 사랑을 못내 아쉬워한 윤심덕과 김우진이 일본에서의 레코드 취입 직후 부산으로 향하는 관부연락선에서 현해탄에 몸을 던지므로 더 유명하게 되어 당시 음반 최고 판매기록을 세우기도 한다. 이런 애틋한 사랑이야기 못지않게 일제시대 민족수난의 상징이 되기도 한 관부연락선은 부산과 일본의 시모노세키 간을 운행하던 정기여객선을 이르는 말이다. 관부연락선은 조선에 건너와 있던 일본인이 자국과의 왕래를 위해 취항한 여객선으로 1905년 경부철도가 개통되면서 취항하기 시작한다. 당시 부산항에는 1600톤이 넘는 거대한 여객선을 정박할 시설이 없었으므로 배가 초량 앞바다에 정박하면 25∼55톤급의 작은 선박들이 연락선으로 다가와 선객과 화물을 육지로 실어 날랐다. 그러다가 북항을 매축하면서 북항 남안 해관 건너 바다 동북쪽으로 비스듬히 임시부두(임시잔교, 목잔교, 철도청 잔교)를 가설하여 이 잔교에 3천 톤, 4천 톤급 배 두 쌍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게 된다. 1912년 8월에는 제1잔교(지금의 제1부두)가 완공되어 관부연락선이 항으로 접안하게 되었고, 일 년 뒤엔 부산역(지금의 무역회관 자리에 있었다)까지 연장된(1910) 경부철도의 철로를 잔교(부두)까지 끌어 들여 관부연락선으로 실려 온 여객을 부두에 정차하고 있는 경부열차로 연결하였다. 동경에서 시모노세키까지는 철도(산양철도)를 이용하고 시모노세키에서부터는 여객선으로 부산까지 이르고, 다시 부산에서는 경부철도를 이용하여 한성으로 오갔으니 철도운송 수단과 해상운송수단을 연결시킨 배라하여 관부연락선(일명 철도연락선)이라 불렀다. 그러나 관부연락선을 타고 한국으로 오는 일본인은 조선대륙을 침략하고 공략하기 위해 발을 들여 놓는 사람들이었고, 반면 부산항을 떠나는 사람들은 농토를 빼앗긴 조선의 농민, 노동자 외에 일본으로 유학 가는 학생이 많았다. 그리고 숱한 젊은이들이 학도병으로, 보국대로, 징용 등 갖가지 이름으로 일본인에 의해 끌려갔고, 여자 정신대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우리네 누이들이 그들의 위안부로 끌려갈 때도 이 관부연락선에 올랐다. 문의:010-8224-5424 부산민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