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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민이 주인되는 행복도시 중구

꽁지머리, 청바지, 빨간 양말의 멋쟁이 노화백
  • 작성일 : 2021-04-27 10:36:56
  • 조회수 : 92
  • 작성자 : 홍보교육과

주경업의 중구이야기 87

소와 여인의 화가 송혜수

`소' 강렬한 색채, 선묘로 표현
 타계 직전 사재를 털어 기금마련
 부산미협 `송혜수미술상' 제정


"1958년 봄이지예. 부평동 일본인가옥 2층 화실에서 처음 뵌 송혜수 선생님은, 훤칠한 키에 기지바지와 얼룩달룩한 윗도리를 받쳐 입고 담배파이프를 입에 문 콧수염의 멋쟁이 화가였지예" 선생에게 24년간을 사사한 원로 서양화가 이강윤(80세)의 회고담이다. 서양화가 송혜수(宋惠秀, 1913-2005) 화백이 부산에 정착한 것은 1958년경, 홍익대학 회화과를 졸업한 박일영의 형(당시 부산혈액원장)이 신병 앓는 동생을 위해 서울에서 활동하던 송화백을 부산으로 초빙해오면서다. 부평동 적산가옥 2층을 전세 내어 화실을 개설하였는데, 18세의 이강윤도 아동문학가 안석순의 안내로 화실을 찾아갔었다. 평양이 고향인 송화백은 평양 숭덕소학교와 숭인중학을 졸업하고 스물대여섯 살 때(1938년경) 서울로 와서 친구의 권고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사진관 일을 하는 등 고학으로 일본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 미술대학)를 어렵사리 졸업한다. 유학시기 재도쿄미술협회와 백우회(白牛會)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젊은 작가들의 독립전에도 출품했다. 매우 왕성하게 전위적인 작품활동을 하면서, 1943년 자유미술가협회전(자유전)에서 본상을 수상하므로 평론가로부터 `이중섭과 함께 민족성이 짙은 작가'로 평가받기도 했다. 두 살 연상인 이중섭과도 만나 소를 통해서 조선인다운 생활정서와 민족정서를 표현하려 했다. 초기의 불상이나 말, 소, 수렵도 등에서 소와 여인으로 그림소재를 좁혔다. `소'라는 대상의 실제성 보다 대상의 골기(骨氣)를 파악하여 강렬한 색채와 선묘를 통해서 회화적인 맛을 내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졸업 후 일제의 징용을 피해 만주에 머물다 해방 후 서울로 돌아와 활동을 재개한다. 김환기, 김병기, 장욱진, 박고성, 김영주, 남관 등 재야화가들과 어울려 `50년 미술협회'를 결성하였으나 6·25동란으로 부산으로 피란 온다. 전쟁을 전후한 격동시대의 불안하고 참담한 정서를 담고 있는 그의 작품들은 그 후에도 오랜 세월 동안 구상과 반구상을 오가며 `소와 여인'을 소재로 삼는다. 그러기에 그의 소 그림은 평생에 걸쳐 실제의 세계에서 관념의 세계로 옮겨가는 `소와 여인'이었다.
가정 형편으로 화실을 쉬었던 이강윤이 다시 부평동 화실을 찾아가니 그 사이 화실은 오아시스 다방(지금의 족발골목, 광복로14-1) 길 건너 한벽당 2층의 넓은 곳으로 옮겨져 있었고, 입구엔 `송혜수미술연구소'라 붉은색 바탕의 작은 표지판도 걸려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강윤은 화실의 학생(주로 여고생)들의 석고 데생지도도 하면서 자기 그림세계도 넓혀나간다. 이 시절 연구소엔 최종태(국전 최고상 수상), 김원호, 전준자, 김정명 등도 함께였다. 이후 연구소는 중앙동 2가 문우당 근처(해관로)로 옮겼다가 미공보원(지금의 부산근대역사관) 남쪽 샛길 광복중앙로24번길 안쪽으로 옮겨간다. 송혜수의 제자들은 신자유미술가회를 결성하여 7년 넘게 전시회를 여는 등 꾸준히 참신한 작품활동을 해왔다.
1980년이 되면서 송화백은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가 10년간 머물며 그림을 그린다. 이 시기 재미극작가이자 미술평론가였던 장소현의 말마따나 치렁치렁한 머리를 늘어뜨린 70세 노인이 청바지에 빨간 양말을 신고 젊은이들과 어울려 정열적으로 디스코를 추면서 영어 못한다고 주눅 들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휘적대고 다니는 괴짜작가, 기인으로 살았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한인화가들 중 가장 열심히 치열하게 창작 활동하는 작가 중 한사람이었다.
1990년 귀국한 송화백은 수영구 남천동 수영구청 인근에 작업실을 연다. 이 시절부터 제자 육성보다 자기작품 제작에 심혈을 쏟는다. 마지막 제자 금경(62세)은 300호 등 대작을 그리면서 캔버스 멀리 떨어져서 전체를 관조하며 생명감 있는 화면구성을 위해 애쓰는 스승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미술연구소'란 명칭도 송화백이 처음 사용(최석태의 『2003년 한국근대예술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2004, 한국문화예술진흥원, p200)했거니와, 시종일관 `재야화가'로 일관해 오면서 "그림은 가슴으로 그려야 되는 선(線)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그림은 배울 수도 가르칠 수도 없는 것"이라 했다.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자유분방한 예술성으로 은근하고 끈기 있는 한국인의 정서를 지켜오려 했다. 고흐와 루오의 그림세계를 동경하였던 송혜수는 2005년 92세를 일기로 타계하기 직전에 살던 집을 파는 등 사재를 털어 미술상 기금을 마련하였다. 부산미협에서는 그의 유지를 받들어 `송혜수미술상'을 제정하고 서상환, 주정이, 차경복, 이강윤, 박윤성, 정광화 등에게 수상하고 있다. 평생을 풍운아로 떠돌며, 전쟁으로 고향을 잃은 실향민으로, 화단의 주류권력에 비켜서서 재야화가로 살았던 그가 마지막 남긴 뜻은 부산 미술계의 반듯한 후배 작가들을 격려하는 일이었다.
문의:부산민문화연구원 255-5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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