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구민이 주인되는 행복도시 중구

사랑의 밀어 수천 통을 주고받은 시인들의 이야기
  • 작성일 : 2021-03-25 15:21:22
  • 조회수 : 36
  • 작성자 : 홍보교육과

주경업의 중구이야기 86

시조시인 이영도

1954년 남성여중·고 국어교사
유치환의 5000통 `연서' 주인공
중앙대 출강, 시조협회장 역임


중구청사 동쪽(복병산 아래) 남성여고 정문 북동쪽, 한국영화의 시원 조선키네마(주)가 있던 터(샘길 30번길 일원)에는 여류 시조시인 이영도의 집이 있었다. 우리에겐 유치환의 연시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의 주인공으로 더 잘 알려진 이영도(李永道, 1916∼1976) 그녀가 통영에서 부산으로 와서 정착해 있었던 곳이다.
청마 유치환과 정운 이영도와의 러브스토리는 둘이 통영여고에 함께 재직하면서이다. 당시 청마는 국어교사였고 이영도는 수예교사였으며 작곡가 윤이상과 화가 전혁림 씨 등과 함께 근무할 때였다. 스물한 살에 딸을 하나 얻고 부군을 잃어 청상이 된(1945년) 이영도가 스물아홉 살 때였고 청마는 서른여덟 살 때였다. 시조시인으로 평생 한복만 입었던 이영도는 누가 보더라도 청초한 아름다움과 남다른 기품을 지닌 여성이었다. 머리 매무새 또한 동백기름을 발라 뒤로 땋아서 말아 올려 조선여인의 전통적인 모습을 보듯 하였다.
경북 청도읍에서 선산 군수 막내딸로 태어난 이영도는 조부께 귀여움을 받으며 한시와 논어, 장자를 읽고 시율(詩律)에도 귀가 트였다. 7살 무렵 집 뜰 안을 흐르는 도랑 때문에 군청직원과 시비가 일자 어린 영도가 나서서 "집터 안으로 흐르는 도랑을 집 바깥으로 흐르게 돌리면 될 것 아닙니까" 하천부지에 묶여 집을 잃게 된 것을 손녀의 기지로 해결함으로서 조부와 군청관리를 경악케 한 일화는 이영도의 대담하고 당찬 면모를 알게 하는 일화이다.
여하튼 두 사람의 열애는 거리와 시간을 뛰어 넘었다. 1954년 무렵 남성여고 교장 서정보 시조시인의 특별 배려로 통영에 있던 이영도가 부산에 왔다. 남성여자 중·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초빙한 것이다. 학교 정문 근처 빈 땅에 방 한 칸 집을 숙소로 삼았다. 그 시절 청마는 경남 함양군 안의 중학교장으로 있을 때였다. 청마는 토요일이면 새벽 6시 부산행 버스를 타고 열두 시간을 달려 부산에 왔다. 그리고 남성여고 정문 곁에 있는 식당에서 이영도를 만났다. 길어야 세 시간 남짓, 이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을 멈추었다. 청마는 딸의 집에 머물고 다음날 첫차를 타고 다시 열두 시간을 버스에 시달리며 안의로 돌아갔다. 이렇게 3년여 한 주도 빠지지 않고 둘은 만났다. 세 시간의 만남을 위해 육백 리 길을 왕래하고도 편지는 편지대로 따로 보내었다.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느니보다 / 행복하나니라 / 오늘도 나는 / 에메랄드 빛 하늘이 훤히 내다보이는 /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들께로 /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 세상의 고달픈 바람곁에 시달리고 나부끼며 / 더욱 더 의지삼고 피어 헝클어진 / 인정의 꽃밭에서 /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 오늘도 나는 너에게 /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이여 그러면 안녕! / 설령 이것이 이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유치환의 행복 전문)
세계에서 가장 긴 연서를 쓰고 간 시인 유치환. 40대 전후의 나이에서부터 유명을 달리한 60세까지 한 여인을 기리며 무려 5000통의 `연서'를 남긴 유치환. 그것도 하나의 일과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일주일 간격으로 서로를 향해 일기를 써서 나눠보던 이들에게 운명의 시간이 너무 빨리 다가왔다. 1967년 청마 사후 이영도는 수천 통의 애정편지 중 가려 뽑은(이영도의 부탁으로 최계락 시인이 뽑는다) 연서로 서간집을 엮었다.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였다.(1968) 책은 비소설 부문 단행본으로 2만5000부 가량이 팔렸다. 그러나 청마 유족과의 판권 소유 다툼이 일어 수익금은 〈현대시학사〉로 넘겨져 시문학상의 기금으로 적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부산을 떠났다. 서울에 자리 잡은 이영도는 수필 돻울타리돽와 돻창가에 앉아돽 등을 발표하고 중앙대학교에 출강하며 시조협회장 등을 역임하지만 1976년 뇌일혈로 쓰러졌다.
미국 유학 중인 딸이 아르바이트 수입 등으로 보낸 돈으로 손수 만든 웨딩드레스 수의를 입고 하늘나라로 갔다. 향년 61세였다. 사후 무남독녀 박진아가 어머니 유품을 정리하다가 미리 써둔 유서를 발견했다. 죽음을 알릴 사람이름과 장례비용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진아에게 주다'라는 부제가 붙은 시 돻보리 고개돽를 남겼다. 동래구 금강공원 케이블카 정류장 근처에는 이영도를 기리는 시비가 서있다. 새, 구름, 산, 들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진 아름다운 빗돌이다. 1966년 시조시인 김상훈이 추모글을 썼다.
문의:부산민문화연구원 255-5424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