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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배기의 산집
  • 작성일 : 2016-11-30 17:5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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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업의 중구이야기 34 - 금수현의 `대청동 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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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의 시 `그네'에 곡 입혀 불후의 명곡 15분 만에 탄생 높은음자리표, 음표 등 한글로  대청동 민주공원 동남쪽 숲 아래 산동네에 금수현 음악살롱(커뮤니티 문화센터)이 숨어 있다. 마을버스를 타고 대청동 4가 망양로의 대청공영주차장에 내려, 주차장 옥상으로 오르면 금수현 음악살롱이다. 1층은 음악살롱으로, 2층은 북카페인데, 산으로 연결된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는 북항 야경이 일품이다.  그러나 작곡가 금수현이 경남여고(당시 부산항공립고등여학교) 교감에서 1947년 경남도립 부산극장 상임이사 겸 지배인으로 발탁되면서, 좌천동 학교사택을 떠나 옮겨온 `대청동 산(山)집'은 이 살롱 산 아래 두 골목길 아래에 있다. 금수현은 그의 자서전 「금수현 나의 시대 70」(1989)에서 "대청예식장을 지나 언덕을 올라 다시 긴 돌계단을 오르고 옆으로 가서 돌계단을 오르니 두 개의 큰 집이었는데, 그 안쪽 집이었다. 그러나 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고 용두산도 보이고, 멀리 부산바다가 보이는 절경이었다"고 `산집'을 찬양하고 있다.  금수현의 대청동 `산집'은 대청공영주차장 아래 망양로 332번길 남쪽 서라벌맨션 A·B동(대청북길33번길 3·4호)이다. 두 동 사이 계단길에는 지금도 그 옛집 대문 앞에 서 있던 수명이 오래된 히말리야시다가 버티고 서 있어(한 그루는 베어나간 그루터기만 있고), 그 옛날 피아노와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금수현 대청동 시절을 얘기하고 있다.  금수현(金守賢, 1919∼1992)은 강서구 대저동 낙동강둑(하천부지)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1930년 낙동강 제방공사를 할 때 넓은 땅콩밭과 대궐 같은 집들을 버려두고 쫓겨나야 했다. 소년 김수현은 초등학교 3학년 학예회 때 음악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으며 4학년부터 6학년까지 담임을 맡은 김춘수 교사에게 음악 이론과 오르간 특별지도를 받으면서 장래 음악가의 꿈을 키운다. 부산제2상업(부산상고-개성고)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음악유학을 떠난다. 신문과 우유배달 그리고 피아노 교습 등으로 학비를 마련하면서 학업을 마치고(동양 음악학교 성악과) 귀국하여 23세 때(1942) 동래여학교 음악교사로 부임한다. 이듬해 피아노전공 정혜금과 결혼하고 해방될 때 `새노래' 등을 작곡하여 각급 학교에 배포하여 애창곡이 되었다. 부산항공립고등여학교(경남여고) 교감 시절 교원들 중 김 씨 성을 가진 교사가 무려 9명이나 되어 성을 `금' 씨로 창시하고 교직원과 학생들 앞에서 `금수현'으로 고쳐 부르기로 공표한다.  어느날 장모 김말봉(소설가)이 처남 처제들과 와서 그의 시 `그네'를 읊으며 작곡을 부탁하므로 즉석에서 15분 만에 반주곡까지 붙여서 작곡을 하여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가 된다.  대청동 집은 대청예식장 뒤 언덕길을 올라 다시 70여 돌계단을 오른 산 위의 집이어서 집 앞 길 아래가 낭떠러지이지만 시가지와 부산항이 내려다보이는 절경이었다. 일본인 집주인 하야다는 원예에 일견이 있어 오래된 백일홍 다섯 그루 등 많은 고급 정원수를 심어 집을 잘 꾸몄다. 1년 후 부산극장장을 사임하고 부산사범 교감으로 발령받으면서는 이 집을 찾는 예술인과 지인들이 더욱 많아져서 곧 잘 주연이 벌어지고 즉흥연주회도 열렸다. 금수현은 1957년 문교부 편수관(대우)이 되어 서울 갈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그는 한글을 특히 사랑하여 높은음자리표, 낮은음자리표, 이음줄, 음표, 쉼표, 마디, 셈여림 등 많은 음악용어를 한글로 지어 사용하도록 했으며 나라, 난새, 내리, 수리, 노상 등 자녀들 이름도 한글로만 지었다.  1965년 작곡가 정윤주의 제안으로 `영필하모니 관현악단'을 조직하고 1970년에는 음악잡지 「월간 음악」을 창간하여 그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2년간이나 발행했으니 금수현의 음악사랑은 그 끝을 모르도록 깊고 넓었다. 문의 ▶부산민학회 255-5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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